교양소설에 속하는 <압록강은 흐른다>는 재독작가 이미륵이 한국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로부터 스무 살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 독일까지 가게 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써내려간 그의 자전적 소설이다.
   내가 이 책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1972년 대학생이 되어서였다. 그런데 문학잡지에 스쳐 지나가는 듯 잠깐 언급되었던 ‘압록강’은 그 당시 내게는 너무도 먼 이국이고 낯선 세계였다. 배경이 일제강점기 시대여서 제목으로 봐선 민족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그런데 독일어 소설이라…. ‘읽어는 봐야겠구나’ 싶으면서도 주머니는 항상 주변의 소소한 관심사 때문에 텅 비어있던 때였기에 책은 쉽사리 내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막상 이 책이 내 손에 쥐어진 것은 책 이야기를 들은 지 무려 34년이 흐른 작년이었다. 그동안 이 소설은 대단히 유명해져서 교과서에도 실리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필독서가 되었고, 이미륵은 추앙받는 독립운동가로 널리 인식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느 책에서고 자기가 보고 싶고, 읽고 싶은 부분만을 보는 경향이 있다. 책에서 주인공은 그동안 부각되어 온 독립운동가로서의 모습은 지극히 암시적이었을 뿐, 오히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고 고향을 떠나와 지독한 노스탈지아에 빠져 있는 인간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러나 의연하게 자신을 지키면서 버티고 있는, 여리고 애잔하지만 단아하고 품위 있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주일 예배 후, 가까웠던 선배의 병문안 모임에 가는 남편을 따라갔던 나는 부천에 있는 어느 병원, 넓은 노상 주차장의 한켠에 홀로 남아 책을 펼쳐 들었다.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받으며 “수암과 같이 놀던 시절”부터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우리들의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때 아마 내 나이가 다섯 살이었고, 그는 다섯 살 남짓했었을 것이다. 어느 날 저녁, 우리들은 가느다란 꼬챙이로 한문책의 어려운 글자를 짚고 있는 아버지 앞에 함께 앉아 있었다. 수암은 아버지가 연거푸 물었는데도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잠자코 있기만 했다. 아버지는 공명심이 많은 사람으로 이미 세상을 뜬 아우의 아들에게 그처럼 어려운 한문을 일찍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글자는 채소를 말한다. 한자로는 어떻게 읽지?”
   성미 급한 스승이 물었다.
   “채!”
   “잘했다.”
   아버지는 그를 칭찬한 다음,
   “다음 글자는 무엇이라고 읽지?”
하고 다시 물었다.

   딴 누나들처럼 셋째는, 대부분 남자 아이만을 가르치는 우리 학교에는 오지 않았다. 여자들은 어머니나 늙은 부인들에게 가사를 배워야만 했다. 나는 자주 셋째 누나가 마당가에 앉아 봉선화를 따서 새끼손가락에 감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따금 그 누나가 방에서 두꺼운 책을 읽고 있는 것도 보았다.
누나는 나에게 수와 경축일, 제삿날 등과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다. 누나가 옛날이야기를 해주지 않고 팔짱을 낀 채 내 옆에 앉아 있을 때에는, 이내 누나가 무슨 질문을 하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사방을 무엇이라 하니?”
   “동, 서, 남, 북.”
   “색은 뭐라고 하니?”
   “청, 황, 홍, 백, 흑.”
   “사철은 어떻게 계속되니?”
   “춘, 하, 추, 동.”
   “봄은 어떤 아름다움을 가져오니?”
   “산에는 꽃이 피고, 뻐꾸기는 계곡에서 노래한다.”
   “옳아! 여름에는 무엇이 아름답니?”
   “가랑비가 밭에 내리고, 담장에는 버들이 푸르다.”
   “유럽이란 나라가 도대체 여기서 얼마나 머니?”
   “그것은 아직 배우지 않았어. 아마 수만 리는 될 꺼야.”
   “한 번은 소군공주가 꽃 없는 나라에 시집갔었대. 아마 그곳인지…. 유럽에도 백합이며 진달래, 개나리꽃이 핀다고 생각하니?”
   “난 몰라.”
   “너는 달빛 아래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지을 수 있게 거기에도 남풍이 불어준다고 믿니?”

   아름다운 달밤에는 샘뜰 살구나무 아래에 아버지가 자리를 펴게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적인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고 이따금 소리를 높여 시를 읊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가 늘 지녔던 근엄함도 사라지고, 만약 좋은 운이 떠올라 기분이 내키면 나와 농까지 했다.
   한번은 아버지가 술병에서 한 잔 가득 따라 나에게 마셔보라고 한 적도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우리 옆에 없던 어느 아름다운 달밤이었다. 달이 어느덧 빈 서당의 지붕 위에 올라와 있었으며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처럼 잘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웃는 얼굴에서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돌아와서 내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물론이지, 그럴 수밖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두 잔이나 마셨거든!”
   어머니는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한두 잔의 술은 결코 해롭지 않아. 나는 이 외로움 속에서 친구를 가져야 하지 않겠소?”
   “오늘 한 번만은 마음대로 하세요.”
   어머니는 조용히 잔을 채웠다.
   어머니는 옆에서 잠긴 듯 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달은 아주 밝았고, 살구는 향그러웠으며, 나는 술상 앞에 앉아 아버지의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삼일운동에 가담했던 자에게는 중형이 가해졌다. 추격당하는 사람들은 외국으로 도망가야 했다. 나는 학생복을 벗어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저녁때가 되어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오더니 침울한 얼굴로 말하였다.
   “너는 달아나야 한다. 국경인 압록강 상류에는 아직도 경계가 그렇게 심하지 않다고 들었다. 거기에서는 북쪽으로 도망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많은 학생들이 도망치다가 체포되었고, 또 사살되었기 때문에 나는 도망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가벼운 양복과 은 회중시계와 돈 보따리가 든 조그마한 버드나무 고리를 주었다. 그것이 내가 다른 세계로의 여행에 가져갈 수 있는 전부였다. 안개와 어둠을 무릅쓰고 어머니는 마을에서 나가는 길을 멀리까지 바래다주었다.
   “용기를 내라. 너는 겁쟁이가 아니다. 너는 쉽사리 국경을 넘을 것이고, 또 결국에는 유럽에 갈 것이다. 이 에미 걱정은 말아라. 나는 네가 돌아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겠다. 세월은 그처럼 빨리 가니, 비록 우리가 다시 못 만나는 한이 있더라도 슬퍼 마라. 이젠 너 혼자 가라.”

   안남 학생들이 책을 읽을 때는 반쯤 노래하듯 낭독하였다. 웬일인지 그 책 읽는 소리가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도 또한 그처럼 읽기 때문이다. 나는 고향을 생각했다.
   내가 유럽에 도착한지 벌써 5개월이 지났다. 나는 내 편지가 한국으로 배달되지 않은 것 같았고, 또 해마다 고향에서 아무 소식 없이 이곳에서 살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언젠가 우체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어느 집 정원에 한 포기 꽈리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 집 뒷마당에서 그처럼 많이 보았는데….
   그리고 곧 철이 바뀌어 눈이 내렸다. 나는 먼 고향의 첫 소식을 받았다. 나의 맏누님의 편지였다. 지난 가을에 어머님이 며칠 동안 앓으시다가 갑자기 별세하였다는 사연이었다.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발견하여 처음 한국어로 번역한 사람은 독일유학생 전혜린이었다. 소설 속의 시간은 1903~1920년, 독일어 출판은 1946년, 한국어 번역은 1959년이었다. 독일어로 사고된 한국적인 것을 시간차를 두고 한국어로 되찾아 온 것, 차라리 이국적으로도 느껴지는 그 이야기를 우리의 과거로 받아들이는 것은 일종의 시공간 감각이 교란되는 경험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순간순간 느꼈던 재미와 감동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책의 한 단어, 한 문장이 의미심장한 울림을 주고, 그가 겪었던 근대화 시기의 사건 하나하나가 내 머리 속에 재구성되었다. 그가 느꼈던 그 시대의 정서, 정조(情操)들이 시간과 언어의 벽을 뛰어 넘어 내 마음에 반향하며 그대로 복원되고 있었다. 초라한 걸로만 알았던 우리의 과거 모습이  이보다 더 이상 소중할 수 없는 아름다운 세계로 가슴 속에 리모델링 되고 있었다. 무심코 밭을 갈다가 보물단지를 발견한 느낌, 전혀 알지도 못했던 사람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고 할까.
   읽을수록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까웠다.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 나는 눈에 고여 오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고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의 무덤에라도 한번 꼭 가보고 싶다고.

   이미륵은 189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의경(李儀景). 미륵불에 치성을 드려 얻은 아들이어서 ‘미륵’이라 불리던 어렸을 적 이름이 나중에 필명이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한학을 공부하였는데, 이때 익혔던 서예와 한학이 훗날 독일에서 그에게 밥벌이가 되어 주리라고 상상할 수나 있었으랴. 1917년 그는 의사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의대 전신)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운동 시위에 가담해서 일본 경찰의 탄압을 피해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상해에서 무려 9개월이나 체류하면서 임시정부의 일을 돌보다가 중국 여권으로 유럽을 향하는 배에 타고, 마침내 독일에 정착하였다. 1921년부터 의학을 다시 시작하였지만 뮌헨대학으로 옮겨 동물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러나 건강 악화로 휴학을 몇 차례 하면서 학업을 마친 그는 직업적인 세계보다 정신적인 활동이 절실했던지 창작활동에 열중하게 된다. 극심한 생활고를 겪다가 1931년 자일러 가(Seyler 家)를 알고 그의 집에 한 식구로 받아들여지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는다.

   그는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단편과 이야기들을 주로 독일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하였다. 문학적인 야심이나 포부가 담긴 순수문학적인 시도라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의 토속적인 민담이나 이야기식의 단편적인 글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글들 속에서 드러나는 작가적인 소질과 인품으로 그는 독일의 지인들로부터 따뜻한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동양문화를 서구에 소개하며 이해시키는 전달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1946년 뮌헨의 피퍼(Piper)출판사에서 나온 <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βt)>는 출간되자마자 독일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그는 일약 뮌헨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는 모든 작품을 독일어로 썼으며, 1945년 해방된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1950년 3월 그는 51세의 파란만장한 생을 마치고 타계하였다. 위암이었다. 그는 2~3배 분량의 속편으로 쓰고 있던 원고들을 정리하고 없애버렸다. 그의 마지막 모습. 요양소에서 옮겨와 자일러 부인의 무릎을 베고 조용히 운명을 기다리던 이미륵은 찬물로 머리를 적신 후 노래를 불렀다. 그가 평소에 즐겨 부르던 노래, ‘동해물과 백두산이…’이었다. 그에게 배워 이 노래를 잘 알고 있는 친구들도 조용히 따라 불렀다.  

   금년 5월, 나는 보름의 일정으로 홀로 떠났던 유럽 배낭여행 중 드디어 남부 독일에 있는 뮌헨에 들렀다. 그리고 홈피를 통해 연락드린 교포 분의 도움으로 이미륵의 묘소를 찾아가 볼 수 있었다. 묘소를 물어본 세 번째 사람이라고 나를 무척 반겨주신 송 선생님. 그를 만난 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펠핑(Graefelfing) 공동묘지에 묻힌 이미륵의 첫 번째 묘소는 3월 초까지도 잔설이 남아있는 응달지역이었는데,〈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가 발족된 후 1995년 넓게 트인 양지바른 곳으로 이장되었다. 묘소에는 한국에서 주문한 묘비가 세워지고 아담한 석등과 나무들이 사이좋게 어우러져 있었다. 조촐하고 편안해 보였다. 나는 준비한 장미 한 송이를 헌화하고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기념사업회에서는 그동안 여러 경로로 이미륵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번번이 무산되고 말았는데, 이유는 독립운동을 한 구체적인 증거자료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작년에 세종대 모교수가 상해임시정부의 활동에 관한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이미륵의 구체적인 독립운동 사실을 알아냈고, 이에 기념사업회에서는 동일인인 이의경과 이미륵을 일치시켜 다시 신청서를 내었다. 정부의 답변은 ‘이의경’은 이미 독립운동가로 추서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본명이었던 ‘이의경’으로 추서되었기 때문에 보훈처 관계자들은 독일에서의 문인 활동 이후의 ‘미륵 리’와는 연결 짓지 못했던 것이었다.  유족을 찾지 못해 이제껏 창고에 독립유공훈장증을 보관하고 있었다. 이의경은 1919년 9월에 열린 궐석재판에서 2년의 구형을 받았고, 이후 내내 독일과 러시아의 요시찰 유학생 명부에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송 선생님은 이미륵과 관련된 뮌헨의 여러 장소를 안내해 주셨다. 처음 묻혔던 응달진 묏자리, 지금은 출판사 사장의 소유가 된 그래펠핑의 자일러가, 슈바빙 지역에 있는 뮌헨대학, 반 나치운동의 상징처가 된 후버(Huber) 교수광장, 숄(Scholl) 남매광장, 이미륵의 하숙집… 매 장소마다 이미륵에 대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남아 있었다. 익히 알려진 이야기 못지않게 알려지지 않은 비화들까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여행의 뜻하지 않은 큰 소득이었다.
   유학시절 전혜린이 자주 들렀다는 카페 제로즈(See Rose)가 근처에 있어 들어가 보았다. 지금은 스페인 식당이 되어있지만 한때는 레닌, 토마스 만과도 관련이 있었던 슈바빙의 명소였다. 지금은 시의 문화재로 등록되어 업종은 바뀌어도 상호는 바꿀 수 없도록 되어있다고 한다.




   다음은 송 선생님 이야기.

   제로즈에서 뮌헨의 명물 맥주를 한 잔 주문하고 나의 감사의 말과 함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60대 중반인 송 선생님은 70년대 초 광부로 독일에 건너와 간호사로 온 부인과 결혼하여 두 자녀를 성공적으로 키워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고향을 말하지 않았는데, 열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졸지에 소년가장이 되어 가난 속에서 그야말로 안 해 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뮌헨에 정착해 한국 식료품 가게를 경영하면서 어느 날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를 읽었는데, 그것이 그에게 하나의 사건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는 이미륵을 독일 이주 한국 이민자의 중시조(中始祖)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미륵이 하숙했던 슈바빙의 건물 1층을 사들여 조그마한 기념실을 만들고 싶은 꿈을 이야기 했다.

   그러고 보니 일찍 독일에 귀화해서 독일인이 되어버린 송 선생님에게서도 이미륵에게서 느껴지는 비슷한 고독감이 비치고 있었다. 그는 술에는 전혀 입도 대지 않았다. 고통과 외로움, 그리고 그것을 이겨나간 노력. 학력은 일천했지만 그의 말에는 힘이 있었고 당당함이 느껴졌기에 이야기들이 끝나갈 무렵 나는 그에게 사적인 질문을 하고 싶은 충동을 누를 수 없었다. 반세기에 이르는 독일생활 동안 자신을 지탱해준 힘의 원천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 그의 눈에 회한 같은 것이 어리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이윽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머니…’였다.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나는 이제껏 신앙은 절대자와 직렬회로로만 연결되어야 유효한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볼수록, 알수록, 경험할수록, 최근에는 일상에서 병렬회로(竝列回路)의 체험이 신앙에 더욱 절실하고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압록강은 흐른다>를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고, 그 감동을 인연으로 하여 또 다른 감동을 받았던 뮌헨에서의 경험은 내게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나는 성지를 찾아가듯 이미륵의 흔적을 찾아갔다. 그리고 육신의 그는 죽었으나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압록강’으로 살아있을 것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 이 글은 <새길이야기> 2007년 겨울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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