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엘제 지그문트(Else Sigmundt: 1901-1975)

 

 가우팅에 사는 리나 자이처 할머니를 통해 이미륵과 가까이 지내던 엘제 지그문트 여사의 주소를 알고 1972년 9월 14일 인사와 함께 한번 찾아뵙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엘제 지그문트는 필자의 편지를 받고 반갑다는 얘기와 함께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집에서 찾다가 다행이 아틀란티스(Atlantis)라는 문예지에 실렸던 「무던이」 외에 요시다 겐코오의 “츠레츠레구사” 번역본과 신문에 실렸던 「압록강은 흐른다」의 서평 등을 찾았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1972년 10월 18일자). 그 연락을 받고 필자는 지그문트 여사와 곧 날자를 정해 1972년 11월 6일, 뮌헨의 헤쓰슈트라쎄 (Heß-Strasse) 6번지에 있는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엘제 지그문트 여사가 이미륵을 처음 만난 것은 1929년 경 처녀시절 자기가 친구 마르고트 슈미트와 뮌헨의 제슈트라쎄 (See-Strasse)에서 함께 방을 얻어 살 때였다고 하였으며, 그때 마르고트 슈미트는 벌써 이미륵과 교분이 있었던 사이였다고 하였다. 그러면 마르고트는 이미륵을 언제부터 누구를 통해서 알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처럼 음악을 공부한 가브리엘레 벡커 여사댁에서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벡커 여사는 이미륵의 동창이며 하이델베르크에서 뮌헨대학으로 함께 전학 온 친구(Irmgard Sartorius)의 숙모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만나 서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엘제 지그문트는 뮌헨에서 대학을 마치고 고등학교 정교사를 거쳐 다년간 바이에른주 장학사로 활동한 여성이다. 그녀의 기억으로는 이미륵이 박사학위를 마치고도 1930년 경 슈바빙의 웅거러슈트라쎄의 라우멘 여사댁에 살고 있었다고 기억하고,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사람은 매우 진지하고 성실하게 보였다고하였다. 당시에 별로 많지 않았던 동양인들 중에서도 이미륵은 인상이 평온하고 박학다식하여 주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선비였다고 한다. 1932년 초 자일러 교수의 딸 베르타에게 피아노 렛슨을 하던 엘제의 친구 마르고트 슈미트가 베르타에게 이미륵 박사 얘기를 하고 나서, 자일러 교수가 마르고트, 엘제, 이미륵 세 사람을 집으로 초청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자일러 교수댁” 단원에서 이미 설명한 부분이다. 어쨌든 그녀는 이미륵이 자일러댁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한 일등공신이었음이 재확인되었다.

  자일러 교수댁이 뮌헨을 떠나 그래펠핑에 새 집을 신축할 동안, 한번은 슈타른베르크호(湖) 옆 베르크 (Berg)에 있는 자일러 교수의 별장에 찾아갔을 때 집에서 기르고 있던 수암이라는 고양이를 이웃집 주인이 총으로 쏘아 죽인 일이 있었다. 총소리를 듣고 놀라서 뛰쳐나온 이미륵이 그 상황을 보고 “왜 고양이를 잔인하게 총으로 쏘아 죽입니까? 내 친구 수암인데 ......”라고 언성을 높이며 항의하자 “괜히 죽인 것이 아니라, 저 고양이가 우리 닭을 물어 뜯으며 계속 괴롭혔어요.”라고 대답하자 “당신은 그래 겨우 그런 사람이요!”라고 이미륵이 항변하였다고 한다. 이미륵이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에게 함께 성장한 절친한 사촌 (수암)의 이름을 붙여서 기르고 있었던 것이다. 엘제는 몇 년 간 이미륵과 같이 다니면서도 그가 그렇게 심하게 화를 내며 언성을 높이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언젠가는 이미륵과 뮌헨의 어느 영화관에 함께 가서 영화를 관람하던 중 스크린에 일본 군인들이 행군하며 총질하는 장면이 나오자 이박사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흥분하여 뭐라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고 한다. 삼일운동 때 왜경들이 만행을 저질렀던 일을 생각하며 그때의 분노와 공포감이 불현듯 떠올랐던 모양이었다. 당시에 엘제는 바로 옆에서 그 광경을 목격하고 너무 놀랐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이후로 이미륵은 아마도 다시는 영화관에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엘제는 전하고 있다.

  엘제 지그문트, 마르고트 슈미트, 이미륵은 1939-42년 경 성령강림절 때마다 아르츠바하에 있는 코올아우프댁의 통나무 집으로 여행을 갔으며, 그 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주로 한국의 명절, 풍습 등에 대해 재미있게 얘기를 해주었으며 산책도 함께 하였다고 한다. 한번은 둘이서 배낭에 간식과 음료수를 준비하고 함께 산행을 다녀온 일도 있었다고 하였다. 훗날 이미륵의 건강이 악화되어 수술을 받고 나서 에벤하우젠 요양소에 입원해 있을 때 어느 날 문병을 갔더니 자일러 여사와 에파가 교대로 산소마스크를 잡고 환자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는 얘기도 전해주고, 환자를 돌보고 있던 자일러 여사와 에파가 너무 피로해 보여 자신이 이미륵에게 물도 떠다 마시게 하며 잠시나마 간호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1973년 12월 17일자 필자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간 자신은 타지에 가서 일을 보고 집에 돌아와서는 계속 감기 때문에 병원에 다니는 일이 많았고, 또 방문객이 찾아와 외출하는 일이 종종 있었으므로 혹 당신이 집으로 전화를 했더라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포르투갈에 사는 옛날 친구 마르고트 디아스 (슈미트) 여사에게 자기가 직접 편지를 써서 보내겠다고 하였으나 별로 새로운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마르고트는 전쟁 말기에 모든 것을 다 잃고 빈 털털이로 포르투갈로 도망가서 새로운 생을 시작하였으니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사실일 것이라고 했다. “어쩌면 당신은 언제고 그녀를 만날 기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시간이 되면 독일에 한번 다니러 오겠다고 했습니다.”라는 지그문트 여사의 말에 한번 만나 볼 기회를 기대했으나 일이 뜻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1974년 11월 22일에는 필자가 발간한 독일판 “이야기 (lyagi)”를 받아 보고 너무 기쁘고 고맙다는 편지를 보냈다. “자일러 교수 내외가 살아계셨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실까!”라는 말도 있었다. 그리고 이미륵의 묘소관리 문제를 걱정하는 1974년 12월 1일자 편지도 받아 보았으나, 1975년 어느 날 갑자기 사망 부고를 늦게 받고 빈소에도 갈 수 없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2) 마르고트 디아스 (Margot Dias) (1908 - ?)

 

 

  1908년 생인 마르고트 디아스 (Margot Dias: 결혼 전 이름은 슈미트)는 음악공부를 마치고 1930년대 초 뮌헨에서 학생들에게 피아노 개인교습을 하던 여성이다. 그녀와 가장 가까웠던 친구 중에는 훗날 바이에른주 문부성의 장학사가 된 엘제 지그문트와 하이델베르크에서 이미륵과 함께 전학한 동창생 이름가르트 자르토리우스의 숙모인 가브리엘레 벡커 여사가 있었고,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 중에는 자일러 교수의 딸 베르타 (일명 무미)양도 있었다. 슈미트 선생과 베르타를 통해 자일러 교수댁과 인연을 맺은 이미륵은 1932년부터 그가 별세한 1950년까지 19년 간 이 집의 아들처럼 지내는 사이가 된 내용은 “자일러 교수댁” 단원에서 상세히 서술하였다.

그간 필자와 몇 차례 만난 바 있는 엘제 지그문트 여사와 이미륵의 뮌헨대 동창인 자르토리우스 박사의 숙모인 가브리엘레 벡커(음악전공) 여사를 통해 포르투갈로 이민 간 마르고트 디아스 여사의 주소 (Margot Dias, Av. Carlos Silva, 26, Oeiras, Portugal)를 알게 되어 1972년 11월 7일 첫 번 째 편지를 보냈더니 12월 1일 기다리던 회신이 왔다.

 

“친애하는 정규화씨,

 

당신이 보내준 편지를 받고 한 편으로는 매우 반갑고 기쁘며, 다른 한편으

로는 당신의 편지가 저를 슬프게 만듭니다. 이미륵이라는 존재가 오래 전

의 일들과 추억을 다시 환원시키고, 그의 비범하고 사랑스러운 인간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새롭게 보이므로 기쁘고, 당신이 이미륵

자료를 수집하여 계획하고 있는 일에 유감스럽게도 제가 거의 기여할 수

없을 것 같아 슬픕니다.

 

  대단히 사무적인 편지같이 보이지만 자기로서는 그렇게 쓸만한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편지 내용으로 보아 그녀는 직장에서 시간에 쫓기며 힘들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며, 또 하나는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조국에 대한 향수가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변색된 인상을 받았다. 조국에 대한 미련이나 애착이 많이 희석되었고, 그와 더불어 친구나 친척들과의 연락도 서서히 줄어들고,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이미륵에 대한 기억이나 추억도 멀어져 버린 것같이 보였다.

  엘제 지그문트여사의 전언에 의하면 그 당시 디아스여사의 주위에는 우연히 유태인 친구들이 있었다는 이유로 당국으로부터 감시의 대상이 되어 그녀는 결국 독일 땅을 떠나야만 했다고 한다. 마르고트 디아스는 1944년 전쟁말기에 독일을 떠나야 하는 이주민들의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포르투갈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그 몇 년 후에 독일에 있는 부모님 집을 정리하고 나서 생면부지의 세계에서 남은 여생을 힘겹게 보냈기에 대부분의 소지품들이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아직도 그 때에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던 사진들과 편지같은 소지품들이 들어 있는 상자가 집안 어딘가에 있기는 하나 도무지 시간이 없어 찾아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쩌면 짐 속에 이미륵의 편지도 몇 통 있을 것 같은데 확실치 않다고 하였다. 그녀는 지금 나이 64세이며, 70세에 정년퇴임을 하면 - 포르투갈은 70세가 정년 - 시간을 내어 자료들을 정리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좀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낼 당시 디아스 여사는 포르투갈 “문화인류박물관 (Museu de Etnoldgia du Ultramar)”에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하였다. 편지를 써내려 가면서 생각이 조금 변한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당신의 간청이 너무나 간절하고 감동적이어서 성탄절 때에나 시간을 내어 상자들을 뒤적거릴 계획입니다”라고 하면서, “그러나 약속은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필자는 이때부터 디아스 여사가 그래도 성탄 때에 시간을 내어 자료를 찾아 보기만 기다렸으나 만족할 만한 연락을 받지 못하였다. 디아스 여사는 1930년대 초반에 이미륵과 가깝게 지내던 사이로 보이기 때문에 자료들과 정보가 무척 소중할 것 같아 연락이 기다려졌다.

 

  뮌헨에 살 때 벡커여사를 통해 이미륵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 있었던 슈미트는 자신을 포함하여 국립중앙도서관장이었던 라이스뮐러 박사, 프란츠 요셉 마이어 박사, 로테 뷜플레 박사 등 7-8명이 이미륵에게서 한자와 서예공부를 하도록 주선하였다고 한다. 당시에 그 수강료는 이미륵에게는 용돈이 아니라 월 수입의 거의 전부였을 것이라고 한다. (엘제 지그문트의 증언). 그녀는 편지에 이미륵에 대한 옛 기억을 되살려서 정확하게 서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미륵의 마술같은 인격을 자기가 글로 묘사하기 어려우나, 그 부분에 대한 것은 자신의 도움 없이도 가깝게 지내던 다른 분들을 통해 더 상세히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미륵을 몇 마디로 묘사한다는 것은 자기로서는 너무나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점과, 또 말하기 힘든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필자는 받아 들였다. 필자로서는 기대도 컸던 회신이었는데 매우 아쉬운 내용이었다.

  1930년대 뮌헨에서 친하게 지내던 가브리엘레 벡커 할머니가 살아 계시다는 말을 편지에 언급했더니 매우 기쁜 소식이라고 하면서 가브리엘레 벡커 할머니와 근 30년 간 소식이 두절되어 지금 살고 있는 주소조차 모르고 있으니 안부도 전해달라고 하며 연락처를 꼭 알려 달라고 했다. 당장이라도 비행기를 타고 독일에 와서 옛 친지들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나 직장일이 너무 바쁘고, 또 가정에 매여 있으니 모든 것이 간단치 않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언제라도 갑자기 상자를 하나 하나 정리하여 도움이 될만한 자료를 찾게 되면 곧 편지를 쓰겠다고 약속하였다. (1972년 12월 1일자 편지).

1973년 3월 18일에는 시간이 잠시 나서 서류들을 정리하다 이미륵의 사진 5매를 찾고 필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정규화씨,

 

서류들을 찾던 중에 마침내 이미륵의 사진들을 발견하여 당신에게 보내

려고 서두르고 있습니다. 이 사진들은 당신이 이미 자일러씨댁에서 받아

새로울 것이 없으리라고 확신합니다. 혹시라도 새로운 것이 있으면 복사

하도록 하십시오. 보내는 사진 다섯 장은 사용 후 저에게 다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충심으로 인사를 전하면서.

 

당신의 마르고트 디아스. 1973년 3월 18일, 싼토 아마로 데

오에이라스

 

  사진 5매 중 두 장은 필자가 이미 갖고 있는 것이었고, 3매는 처음 보는 사진들이었다. 1973년 4월 4일 디아스 여사에게 사진과 함께 편지를 보내면서 최근에 지그문트 여사로부터 몇 개월 전에 여사님의 부군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늦게나마 조의를 표한다고 하면서 간단한 조의문을 써 보냈다. 그랬더니 4월 10일 그녀로부터 편지와 사진을 잘 받았다는 회신과 함께 지난번 보내준 사진에 대해 설명도 써 보내줘 고맙게 잘 받았다. 필자는 학교 일이 바빠 여기 저기에 편지를 보내기가 쉽지 않았고, 1976년에 귀국하면서 생활에 변화가 생겨 디아스 여사와의 서신왕래도 두절되고 말았다. 꼭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인데 포르투갈까지 찾아갈 시간이 없었고, 또한 디아스 여사 자신도 너무 바빠 서신으로만 가끔 소식을 듣는 정도였다.

 

 

 

                                   범우사발행 [책과인생]  2010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