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내용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중인 藜堂隨筆集 (여당수필집)의 일부분입니다.
초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셨던 여당 김재원박사님께서 저술한 책입니다.

「뮌헨」에서 이미륵씨 생활도 한국 사람들이 분산되던 때부터 점차 힘들게 되있고 설상가상으로 병으로 오래 고생하게되어 의학공부는 계속하지 못하고 그때 오랫동안 의지하고 있던 모독일부인에게 더 이상 의지할 수도 없어 1926년이 아니면 1927년 「뮌헨」시로 거처를 옮기고 전공과목도 의학에서 생물학으로 옮겼다. 학비는 물론 누구도 보조하는 사람이 없이 고학을 하였는데 1927년부터 2년간 「아렉산더, 폰·훔볼트」장학금을 받아 1929년에는 뮌헨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생물학에서 비교적 단시일 내에 학업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의과의 첫 2년의 과목과 생물학의 과목이 같은 것이 많아 크게 시간의 손실은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논문제목은 그 논문의 별제가 지금 내 서재에서 갑자기 찾아낼 수 없어 정확하게 적을 수는 없으나 「계획적으로 만든 조건하에서의 재생현상」이라는 것이다. 내가 이미륵씨를 만난 것은 바로 박사학위를 타고 장학금은 떨어져서 생활할 방도가 전혀 서지않던 그 때 였다. 기억도 새롭거니와 이미륵씨는 그 때 「이살」강에서 멀지 않은 「웨스터뮬」가(Wes-termuhl Strsase)라는 곳에 살고 있었다. 방세는 2O마르크 정도의 빈대가 많은 조그만 방이었다. 그의 유일한 수입이라고는 신문 같은데 가끔 쓰는 한국의 이야기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생활비의 몇 분지 일도 되지 않았다. 내가 이미륵씨를 만난 다음날부터 나와 매일 열두시에 만나서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하였다. 독일어에 불통한 나는 처음 적어도 2,3개월 동안은 이씨가 나의 유일한 말동무이었고 지도자이었다. 그는 정확한 독일어에 대한 지식의 소유자로 그 덕택에 나 자신도 오늘까지 독일어에는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씨는 유달리 인격이 온후한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항상 여자들의 사모를 받은 사람이다. 내가 1929년에 그를 만났을 때는 그는 「로자·마우러」(Rosa Maurer)라는 영문학 전공의 여학생과 극친한 사이로 나도 그 댁에는 몇 번이나 불리워 갔다. 그 「마우러」양댁은 「암 그록겐박」(AmGlockenbach) 2번지의 4층에 있었으며 「마우러」양의 아버지는 직업학교의 수학선생이고 어머니는 뚱뚱하고 온화한 부인이며 위로는 「요한나」「올가」의 두 언니가 있었다. 지금은 다 근60이된 사람들이다. 이 「로사」양이 달마다 부모에게서 받은 용돈이 2O「마르크」였는데 그 돈을 그대로 이미륵씨에게 가져오곤 하였다. 1930년 초에 어떤 사정으로 나에게 오는 학비가 잘 오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얼마씩 이씨에게 드리던 돈이 떨어지게 되고 또 한편 나도 제대로 대학에 들어가서 이미륵씨와 매일 만나는 일이 필요없게 되므로 그의 생활은 더 어렵게 되었다. 하루는 대학의 학생기숙사에서 만난 일본인학생이 일본말로 쓴 의학논문을 독일어로 번역할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이것이라도 하지않겠느냐고 말하였드니 싫어하면서도 이것을 번역하여 그것으로 겨우 얼마동안 생활을 하였을 정도였다. 1930년대의 경도대학의학부의 독일어로 된 논문집 중에는 이미륵씨의 번역이 수 십편있을 것이다. 그 때를 전후하여 이미륵씨는 「뮌헨」시 「슈바빙」지주의 웅가레르가(Ungarer St)의 어느 노부인의 「아파트」에서 다른 젊은 독일 청년들과 함께 자취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나도 수차 그 곳에 가서 밥을 같이 먹은 일이 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취사장이 형용할 수 없게 더럽던 느낌이다. 그들 청년들은 대개 아직 출세를 못한 시인 화가 같은 사람들로 그 사람들의 생활이 이른바 「뮌헨」에서의 「슈바빙」생활인 것이었다. (「슈바빙」지주에는 「보헤미망」들이 많이 살았다.) 그때는 이차전쟁 전 독일의 정계가 불안한 때로서 전국의 실업자가 칠백만으로 직업을 제대로 가진 사람이 정말 적을 때이다. 이곳에 살던 중에 이미륵씨 일생에 대단히 큰 역할을 한 「자일러」부인을 만났다. 「자일러」가는 「아헨」시의 명문출신으로 남편은 「알데·픠나코테크」라는 미술과의 관화부장인 「알프레드 자일러」박사인데 그 때 그들의 주택은 「님펜부르크」궁전의 근처인 북「아우프파르즈」가 25번지에 있었고, 별장은 「스탐베르그」호반의 「베르그」라는 데 있었다. 나 자신도 수차 두 곳에 다 초대되어 간 일이 있었는데 북「아우프파르즈」가에는 일가가 여행으로 떠난 뒤 빈집을 맡아서 약 1개월간 자취하고 산 일이 있다. 「자일러」일가와의 교분이 갑자기 두터워져서 결국 이 이역에서 고생하는 청년을 어느 의미에서 식객으로 자기 집에 두게 되어 그 때부터 이미륵씨는 숙식에 걱정은 없어졌다. 이것이 1933년경의 일이다. 이때부터 자기의 취미에 맞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가지 문학과 철학에 관한 서적을 수독하였고 가끔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써서 신문에 발표하였다. 1934년에 나는 「뮌헨」대학에서 학업을 마치고 그 해 6월에 「벨기에」로 가서 그 곳 어느 대학교수의 조수로 그날 그날 서재에서 책이나 뒤지고 살게 되었다. 그래서 한 번은 내가 마련한 돈으로 이미륵씨가 파리에 약 일주일간 여행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내가 있던 「안트워프」시로 내방한 일이 있었다. 친지들은 이미륵씨의 인격에 깊이 감탄하였다. 지금 이미륵이란 필명으로 알려져 있는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도 「자일러」댁에서 식객이 되어 우선 숙식에 걱정이 없게 된 후에 비로소 쓸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이 책을 쓰게 되는 데는 지금도 「뉴욕」시에 있는 강용흘씨의 초당(Grass Roof)이라는 소설이 자극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장씨는 1933년 자기의 소설로 생긴 상금으로 「로-마」에서 약 9개월 있다가 1934년 6월말 「뮌헨」에서 이미륵씨와 교제가 생기고 아마 그 때 이씨도 그런 책을 쓸 생각을 가지기 시작하였던 것 같다. 1938년경 「수암과 미륵」(Suam und Mirok)이라는 소설『압록강은 흐른다』의 첫머리 비슷한 것이 스위스에서 나오는 「아트란티스」(Atlantis)라는 잡지에 실려졌다. 그러나 이 책이 처음으로 출판되기는 전쟁 중이고 내가 그 책을 이미륵씨에게서 받기는 1948년 내가 처음으로 미국에 갔을 때이다. 내가 이미륵씨를 최후로 만나기는 1939년 6월인 전란이 구주 전체를 휩쓸 3개월 전이었다. 나는 그 때 「벨기에」에서 떠나 자동차로 「라인」강을 따라 여행한 후 「슈바르츠발드」지방을 거쳐서 「도나우」강을 따라 「바바리아」주 쪽으로 나왔다가 「뮌헨」에 4~5일 있은 일이 있었다. 그 때는 「자일러」가에서 북「아우프파르츠」함의 집을 팔고 교외인 「그래펠핑」(Graefelfing)이라는 곳에 집을 신축하고 옮긴 후이므로 그 곳으로 찾았다. 이것이 이미륵씨가 「그래펠핑」의 공동묘지에 뭍히게된 인연인 것이다. 지금 기억이 나는 것은 그 때 이미륵씨는 두 가지 일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독일어로 우리말의 문법을 쓰는 일이고 하나는 무슨 문학작품이었는데 그것이 『압록강은 흐른다』이었는 지는 알 수가 없다. 그 때 쓰던 우리나라 문법은 그 후 어찌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는 학문적으로 세계의 여러 가지 언어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또 그러한 언어학적인 지식으로 쓴 우리말 문법은 당시 독일 모언어학자에게서 격찬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 때 나도 최현배씨가 쓴 첫문법 책을 구하여 참고로 쓰라고 드린 일이 있었다.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의 이름은 「Mirok Li」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즉 미륵보살의「미륵」으로 이미륵씨 자친이 지어준 아명이다. 후에 이것이 「펜 네임」이 되어 버렸다. 이 책은 내가 1948년 미국에 갔을 때 벌써 영어 번역초고는 되어 있었고 나도 그 출판을 노력한 일이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지금은 「The Yalu flows」라는 영어 이름으로 출판되어 있어 한국에 관한것으로는 제일 좋은 책이라는 칭찬을 나도 몇 번이나 들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출판되었다는 것뿐 출판사도 모르고, 또 나 자신 책을 직접 본 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