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만의 귀향

 

- 이미륵 평전 <정규화 / 박균 지음, 범우사 2010)을 읽고 -

 

김 광 규 (시인, 한양대 명예교수) 

 

  우리는 누구나 자기 인생을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으로 느끼고, 당대를 난세로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물며 19세기 마지막 해에 태어나, 망국의 굴욕, 일제 강점, 3.1 독립운동, 30년간의 망명으로 이어지는 통한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면 어떻겠는가. 망명국의 언어인 독일어로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조국을 독일에 알리려고"(p.279) 노력했고, 절제된 언어로 "잃어버린 것에 대한 고통과 허무"(p.199)가 형상화된 소설들을 발표하면서 전후 독일 문단에 등단, 저작활동을 하다가 51세를 일기로 이역만리에서 병사한 조선 지식인 이미륵 (본명: 이의경 1899-1950).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감내해야 했던 "대격변의 20세기, 그 지독한 혼돈"(p.16)은, 이제 최첨단 산업국가로 고속 성장한 21세기 한국의 신세대들이 상상하기도 어려운 난세였을 것이다.

 

  그 암울한 시대에 독일 망명작가로 살았던 한국인 "이미륵의 생애와 작품, 그리고 교육자로서의 철학과 사상에 대한 총체적 전기"(p. 5)를 기술한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는 작업일지,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세상에서 잊혀진 채, "잡초가 무성하고 초라했던 이미륵의 무덤을 오랫동안 참배하면서, 그의 업적을 세상 밖으로 알릴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p. 299), 지금까지 무려 40여년 세월을 "그의 생의 흔적을 찾는 작업"(p. 299)에 헌신한 독문학자가 있다. 정규화 박사(성신여대 명예교수)이다. 그는 이미륵이 독일어로 남긴 문학작품들을 국내에 소개하는 한편, 뮌혠 근교에 방치되어 있던 고인의 묘소를 이장하고 정성으로 보살피며 이미륵 연구와 추모 사업을 추진해 왔다. 1967년 독일 유학시절, 논문 자료 수집차 뮌혠의 한 고서점에 들렀다가, 이미륵의 오랜 지인이었던 뵐플레 박사와 "숙명적 만남"(p.300)을 갖게 되고, 이미륵의 지인들을 처음으로 수소문하기 시작했을 때, "당시 가난한 유학생 처지로는 전화를 놓을 형편도 못되어서 편지를 쓰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p.301)고 한다. 때로는 몇 달씩 기다려 회신을 받은 후, 이미륵에 관해 증언을 해 줄 옛 지인들을 방문해 인터뷰 하고, 그들이 소장하고 있던 귀중한 각종 원본 자료들을 기증 받고, 그들을 통해 이미륵 생전의 또 다른 지인들을 수소문 했다. 저자 정규화 교수는, 독일 문단에서 "자기를 본보기로 삶의 가장 고귀한 가치를 입증한 [] 작가"(p. 282)이며 "진정한 휴머니스트"(p.167)로 평가되었으나, 정작 고국에서는 오랜 세월 잊혀졌던 이미륵을 재발견하는 작업에 반 평생을 몰두해왔다. 그 결실로, 제자 박균 씨와 함께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이미륵 평전>(범우사, 2010)이 금년 봄에 출간되었다. 한국 최초의 이미륵 평전이면서 이미륵에 관해 지금까지 나온 가장 생생하고 총체적인 자료이다. 이미륵 서거 60주년을 맞이한 올해, 저자는 '인간 이미륵'을 생생하게 되살린 이 평전을 고인의 영전에 헌정했다. 1919년 망명길에 오른 후 생전에 다시는 귀국하지 못했던 이 한국계 독일작가가, 망명길에 오른 지 91년만이자 탄생 111년 만에 부활해서 생전에 "그토록 열망했던 고향"(p.278)으로 돌아와, "또 다른 사후의 생"(p. 296)을 얻게 된 셈이다.

 

  저자 정규화 교수는 이미 1989년에, 이미륵 번역 작품 선집에 <압록강은 흐른다> (정규화 역, 범우사 1989)에서, <압록강은 흐른다>, <무던이>, <실종자>, <탈출기>,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 등, 한국에서 오랜 세월 잊혀져 있던 이미륵의 소설들을 번역 소개해 국내에서 이미륵 재발견 작업에 귀중한 초석을 놓았다. 그 결과, <이미륵 평전> 말미의 꼼꼼한 자료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2003년 이후부터 한국에서도 초-중-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이미륵의 작품이 실리기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압록강은 흐른다>는 1946년 독일의 명망 있는 피퍼 출판사에서 출판되어 호평을 받았다. 후에 독일의 교과서에도 실렸으며, 1959년에 전혜린 번역으로 첫 한국어판을 선보였던 이미륵의 대표작이다. 작가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1920년 망명 첫 해까지의 회상을 자전적으로 그린 이 성장소설은 그 자체가, "수많은 슬픔과 비애를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회고록"(p.283)이라 할 수 있다.

 

  제3제국 히틀러 독재와 2차 대전 패망으로 총체적인 "무력증"(p.167)에 빠져 있던 독일에서 <압록강은 흐른다>가 불러온 감동의 파장에 대해, <이미륵 평전>은 1946년 '베를리너 차이퉁' 등 현지 언론에 실린 서평 원문들을 세밀하게 수집해 번역 소개하고 있다. 출간 당시 독일 언론에서 많은 찬사가 쏟아졌다고 한다. "한국인에 의해 씌어진 이 놀라운 독일어 산문"(p.168)이, "작위적이지 않은 아주 간단명료한 언어"(p.165)로 "어린 시절에 대한 옛 이야기를 밝고 투명하게 묘사"(p. 168)"했으며, 이 소설이 "아주 섬세한 유머로 다정한 마음을 표현하는 진실한 이야기"(p. 166)라는 호평이 이어졌다. 독일 문학계의 관심은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작품 자체에만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륵 평전>에 인용된 서평과 편지들이 증명하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독일인들은 비로소, 이미륵의 고향이 "황해와 동해 사이에 있는 [] 품격 있는 문화를 지닌 반도국"(p.166)이고, 일본인들에 의해 "고립과 불통의 벽"(p.168) 속에 갇힌 나라임을 알게 되었다. "문화민족인 한국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던가"(p.198)를 깨닫고, "한국인 이미륵의 내면 깊숙히 깃들어 있었던 그의 사상과 그의 유산들"(p.281)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이미륵의 내면에 깃든 사상과 정신적 유산을 재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미륵 평전>을 읽는 오늘의 한국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자는 이미륵 연구 "40년 세월의 무게만큼 아주 방대한 자료들로 축적"(p.299)된 <압록강은 흐른다> 원본을 비롯해, 독일 잡지에 발표된 수십 편의 단편들, 유고로 남겨진 미발표 타자본 원고들, 백여편의 서평들, 철학 강의록, 한국어 문법, 그리고 수십 통의 편지" (p.5) 들을 적재적소에 생생하게 인용했다. 378페이지에 달하는 이 방대한 평전이 물 흐르듯 막힘 없이 잘 읽히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생생한 진술 방식 때문일 것이다. 적절하고 세심하게 배열된 귀한 사진자료들 -1920년대 신한민보 기사나, 1922년 뷔르츠부르크 의대 학적부 사진 등 희귀자료까지- 도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당시의 자료들을 이만큼 수집하기까지, 정 교수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정성을 기울였을지 한 눈에 볼 수 있다. 망명 이후 심한 경제적 압박 속에서 병마와 싸우며 유학생활을 하고 학위 논문을 쓰던 처음 십여 년간 이미륵은 자신의 삶의 흔적을 의식적으로 지워버리기도 했다. 신병이 재발해 요양소로 가면서, "살아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던 이미륵은 떠나기 전에 미리 짐을 정리하면서 편지와 문서의 대부분을 불살라 버렸"(p. 62)다고 한다. 하지만 정규화 교수는 90년대 말까지 생존해있던 이미륵의 지인들과 여러 방법으로 서신왕래를 지속했다. 예컨대, 2차 대전 후 스웨덴으로 이민간 1930년대 초반 뮌혠 시절의 친구 에곤 베른하르트 베너(p.330)를 스웨덴으로 직접 찾아가는 노력까지도 아끼지 않았다. 심혈을 기울여 이미륵 개인사의 궤적을 재구성해 온 저자의 이러한 숨은 노력 덕택에, 망명생활의 시공을 세밀하게 보여주는 각종 자료들이 이 평전에 다각적으로 집약될 수 있었던 것이다.

 

  "품위 있고 예의 바른 동양 청년" 이미륵이 "탁월한 학문 세계와 심오한[] 정신세계"를 가졌으며, "기품 있는 행동 하나하나, 둥근 검은 테 안경 너머로 총기 어린 눈빛, 가난 속에서도 일상에 찌들어 있지 않은 밝고 순수한 미소,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뜻을 확신 있게 전달하는 절제된 말솜씨"를 지녔고, "독특한 W 발음을 제외하고 그의 독일어 실력은 아주 완벽했으며, 심지어 바이에른 사투리까지도 잘 구사했다"(p. 86 )는 등, 사진 자료에 담아낼 수 없는 섬세한 묘사들이 이미륵을 살아있는 한 인물로 생생하게 재현해 준다. 예컨대 게오르크 가브리쳅스키가 보내온 서신도 그 가운데 하나로 "이미륵은 [] '오직 진정한 군자'로 표현될 수 있는 덕목의 화신"(p. 316)이라는 글귀를 다음과 같이 담고 있다.

 

  "내가 그를 감탄하고 존경하는 것은 우리를 깊이 묶어준 깊은 우정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대화를 통해서 당시까지만 해도 내가 모르고 있었던 오랜 역사를 가진 동양문화를 내게 알려주었습니다. 고향 얘기며, 역사에 얽힌 과거 얘기를 많이 해 주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편지도 몇 통 받은 것 같으나 모두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 어느 날엔가 공습이 끝난 후 화염에 쌓인 집을 내가 막 떠나려 할 때 그가 바로 앞에 나타나서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그것도 그 분 혼자서 나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정규화 교수가 찾아낸 이미륵의 지인들은 그의 삶의 산 증인들이었을 뿐 아니라, 이미륵의 영향을 받아, 후에 한국 혹은 동양과 연관을 맺게 된 경우도 많았다. 저자는 그 궤적 또한 놓치지 않고 추적하고 있다. 언론인을 꿈꾸던 독일 청년 발터 라이퍼는 1946년 이미륵 관련 서평을 읽고, 당장 책을 구입해 읽다가 "이미륵의 놀라운 독일어 표현과 신비로운 나라 한국에 심취"(p.200)하게 되었고, 그래펠핑으로 이미륵을 직접 찾아가기에 이른다. 후에 그는 1979년부터 1983년까지 주한독일 대사관 문정관으로 근무하면서, 저자가 이미륵의 유고집 두 권을 발간할 때, 독일 외무부에서 출판비 지원을 받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1985년 독일에서 <이미륵 협회>(p.322)를 결성해 이미륵을 기리는 작업을 계속했다고 한다. 1949년 뮌혠 대학 의과 대학생이었던 볼프강 바우어는 "우연히 동양학 강의실 옆을 지나다 열려진 문틈 사이로 []능숙한 독일말로 강의하고 있는 동양인 교수를 발견"했고, "그 동양 학자의 품위있는 모습에서 발산되는 견고한 자기확신과 세련된 말솜씨에 매료"되어 "점차[] 이미륵이 펼쳐 내는 동양문학 속 절대자유의 파노라마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그리고 그 해 겨울 학기, 바우어는 의학을 포기하고 동양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이미륵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 독일 청년은 훗날 뮌혠대학 동양학부 교수가 되었다"(p.266)는 일화는, 의학도에서 생물학도로, 작가, 동양학부 교수로 변모했던 이미륵의 삶과 그의 영향을 받은 제자의 행보를 중첩시켜, 이미륵이 동시대인들의 변화에 기여한 실천적 업적을 보여주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이번에 출간된 <이미륵 평전>은 이미륵에 대한 영원한 기억을 그의 고국에서 입체적으로 부활시킨 소중한 업적이다. 다만 1945년 2차 대전 종전과 한국 해방 이후 1950년 이미륵이 타계할 때까지 5년의 기간이 있었는데, 그가 왜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에 단 한 번도 돌아올 수 없었는지, 당시의 시대 상황이 새삼 안타까울 뿐이다.♠

 

                                 범우사발행 [책과인생]  2010년 7월호 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