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리나 자이처 (Lina Seizer; 1905-2000)

 

리나 자이처 (Lina Seizer)는 자일러 교수댁에 오랫동안 한집 식구처럼 함께 살았던 가정부로서 이미륵과도 격의없이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어느 날 자일러 교수의 아들 오토를 만나 그녀의 주소를 알게 되어 편지왕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필자는 1972년 9월 14일 그래펠핑에서 얼마 멀지 않은 가우팅 (Gauting)에 사는 리나 할머니의 초대를 받게 되었다. 비록 늦게 결혼하였지만 성실한 남편을 만나 집도 큼직하고 정원도 잘 가꾼 시골집에서 내외가 조용히 살고 있었다. 필자가 도착하기 전에 할머니는 차(茶)와 케잌을 준비하여 놓고 필자에게 이야기해 줄 이미륵에 관한 사항들을 메모지에 적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륵이 자일러 교수댁에 오게 된 계기, 즉 1944년 포르투갈로 이민간 당시의 마르곳 슈미트 (나중에 디아스 여사가 됨)양과 엘제 지그문트를 통해 이미륵이 자일러 교수댁으로 오게 된 얘기 (“자일러 교수댁” 단원에서 상세히 언급됨)부터 시작하여 근 20년 간 한 집에서 지낸 흥미있는 일들을 얘기했다.

자일러 교수의 초대를 받은 “마르곳, 엘제, 이미륵이 다녀간 후 식구들이 모두 이미륵의 유창한 독일어에 감탄하며, 자신들의 독일어가 이박사보다 못한 것 같다”고 하였다고 리나는 당시를 회상하였다. 이미륵은 자일러 교수댁으로 오기 전 슈바빙의 라우멘 여사댁에 방을 구해 매우 어렵게 지내던 차에 자일러 교수댁에 와서 함께 살아도 된다는 제안을 받고 그 댁에 입주(1932)하여 그가 별세한 1950년까지 한 식구처럼 함께 생활하였다. 리나 할머니도 이 기간에 이미륵과 한 집에 살았으니 옆에서 이미륵을 볼 수 있었던 기간이 햇수로 무려 18년이나 된다. 자일러 교수 내외를 제외하면 이미륵을 가까이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이 바로 리나 자이처였다. 이미륵이 처음 얼마 동안은 자일러 교수댁의 분위기에 낯설기도 하였지만 그의 성품이 워낙 원만하고 점잖아 곧 한집 식구처럼 생활에 적응하였다. 그는 남달리 예의가 바르고 매사에 정확하여 가족들이 모두 만족하였고, 그녀와도 곧 친해져 간간히 부엌일과 집안일도 도와주었다. 뮌헨에서 그래펠핑으로 이사한 후에는 부엌에 땔감이 부족하면 그녀와 함께 뒷산에 가서 나무도 해오고, 마당의 텃밭에 여러 가지 채소도 심어 먹었으며, 또한 때때로 부엌에 들어가 보기에 생소한 한국음식을 만들어 함께 먹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미륵은 시간이 나면 늘 자기 방에 올라가 책을 읽고, 또 뭘 쓰고 있었으며, 취미는 가끔 여행다니는 것과, 자전거를 타고 여기 저기 다니는 일, 사진을 찍는 일이어서 집에다 암실까지 만들어 직접 현상하여 사진을 뽑아 친구들에게 우편으로 보내주는 것이 큰 즐거움으로 보였으며,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인지 수시로 자전거를 타고 우체국에 다녀오곤 하였다. 가끔 집으로 찾아오는 친구들과 제자들이 많았고, 그들이 서예공부를 즐겁게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 시기에 엘제 지그문트, 에파 크라프트, 헬레네 군데르트 등 젊은 여성들도 자주 찾아오는 손님이었으며, 때로는 동향인으로 보이는 친구들도 찾아와서 정답게 얘기를 나누었다. 시간이 있을 때면 자신이 자일러 교수댁에 오기 전, 즉 슈바빙의 라우멘 할머니 댁에 하숙할 때 친구들과 지내던 추억담을 얘기하면서, 고생스러운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그때가 그리울 때도 있다고 하였다.

이미륵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은 것을 자신이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면서 한마디로 “이 박사는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였다. 한 때는 매일 자기 방에서 꾸준히 글을 썼으며, 그것이 아마도《압록강은 흐른다》나 신문들에 발표한 다른 단편들이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가끔 휴식을 취할 때는 주로 자일러 교수 내외와 함께 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었고 때로는 자일러 교수의 손자(크리스톱)와 정원에서 함께 놀기도 하고, 머리도 깎아주고, 놀이터에서 데리고 놀다가 손을 잡고 산책을 다녀오는 때도 많았다. 그리고 등산을 떠날 준비를 할 때면 간식꺼리, 신발, 배낭 등을 챙기느라 바빠하던 일들도 기억이 난다고 하였다. 저녁이면 자일러 여사와 이미륵이 함께 앉아서 써놓았던 원고를 나누어 읽으면서, 중간 중간에 각자의 의견을 제시하고, 때로는 자일러 여사가 조용히 이미륵이 구상하고 있는 내용을 듣는 때도 있었다고 하였다.

 

전쟁말기에 연합군의 폭격이 아주 심한 날 공습경보가 울리면 이미륵과 자신이 함께 중요한 생필품을 들고 지하실로 내려갔다가 경보가 해제되면 다시 들고 올라왔던 일도 생각이 난다고 하였다. 1944년 성탄절, 이미륵이 코른탈에 사는 헬레네 군데르트 여사에게 보낸 편지를 보아도 혼란스러웠던 전쟁말기에 자일러 교수댁에서 지내던 이야기가 담겨 있다. “(……) 공습경보와 폭격으로 인해 모든 것이 중단되고 말았어. 폭격은 벌써 새벽에 시작되어 식구들이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지하실로 들고 갔다가 다시 들고 올라오곤 해. 하루에 보통 서너 번 경보가 울리고 있어. (……)”

 

이미륵이 별세하기 1년 전 가까운 친구들끼리 함께 ,파슁‘을 즐긴 내용과 그때 찍은 사진이 매우 인상적이고 흥미롭다. 파슁은 독일에서 매년 11월 11일부터 그 다음 해 2월말까지 계속되는 축제이며, 이 축제는 어느 특정 사회층이나 지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전 국민이 즐기는 독일의 전통적 카니발이다. 1949년 2월 7일 슈비네쾨퍼가 부르는 내용을 이미륵이 옆에 앉아 타자로 찍은 익살스러운 초대장이 주목을 끌고 있다.

 

“사랑하는 리나, 우리는 지금 네스커피를 마시면서 앉아 있어. 파싱이 다가와 기뻐서 미리 포식들 하고 있어. (……) 사람들이 모두 리나의 음식솜씨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리나없이 축제를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어? 파슁은 1949년 2월 26일 아킬린다슈트라쎄에서 거행돼! (……) 복장이 없으면 종려잎으로 가리면 되는 것이고, (……) 입장료는 무료. 12시부터는 뽀뽀도 자유로워. 이것이 리나를 유혹하지 않을까? (……)”

 

1949년 2월 7일 이미륵 (쇠약해진 몸)“

 

 

그해 파슁 때 찍은 사진은 굉장히 익살스럽고 재미있게 보인다. 오토, 에파 크라프트, 리나 자이처, 슈비네쾨퍼, 이미륵 기타 여러 사람들이 자리를 같이하여 웃어대는 모습이 재미있고 행복해 보인다. 이 행사의 준비를 위해 리나에게 보냈던 파슁 초청장이 바로 위에 요약한 편지이다. 이날 밤에 늦게까지 모두 함께 흥겹게 마시고, 춤추며 놀았으리라 생각되며, 그 모임이 1949년이었으니 이미륵으로서는 마지막 축제였을 것이다. 그로부터 1년 후, 즉 1950년 3월 20일 이미륵은 자일러 식구들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하였다. 이미륵이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여 리나가 물 한 그릇을 갖다 주었더니 얼굴에 부으면서 “아아, 시원해” 하고는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리나 할머니는 해마다 3월이 되면 8일(생일)과, 기일(己日)인 20일에 꽃과 물을 들고 묘소를 참배한다고 하였다. 필자가 귀국하기 전 1975년 3월 18일자 편지에 - 생일 열흘 후 ―할머니는 꽃을 들고 묘소에 다녀왔다고 하면서 “가보았더니 묘소가 깨끗이 정리되었고, 또 묘비가 깨끗이 닦여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분명코 당신이 찾아와서 만들어 놓은 것이겠지요. 그의 조국에서 온 사람들이 그를 기억해 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라고 쓰면서 필자에게 고맙다는 뜻을 표했다. 리나 할머니가 아파서 묘소에 못오면 볼게무트 여사나 그녀의 자녀들이 대신으로 참배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슈타른베르크 호湖 옆에 사는 이미륵을 안다는 어떤 할머니를 찾아가 필자의 얘기를 했더니 고마운 일이라고 하면서 연락할 일이 있으면 하라고 주소를 받아다 필자에게 주었다. Margarete Vetter, Rheinlandstrasse 8, 8130 Starnberg, 전화: 08151-6650. 그러나 만날 수 있는 날자가 여의치 않아 끝내 만나보지 못했다. 이 시기는 필자가 대학일을 마무리하는 단계로 시간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가레테 페터 할머니와 전화로만 통화하였을 뿐, 직접 만나지 못하고 귀국한 것이 아쉽다. 귀국 후 유고집 《이상한 사투리 Der andere Dialekt》와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 Vom Yalu bis zur Isar》가 출간되었을 때 리나 할머니에게도 우편으로 보내드렸더니, 아직도 자기를 기억해 줘서 고맙다고 하면서 정겨운 편지를 보냈다. “나는 매일 저녁 시간이 있을 때면 그 책들을 읽고, 또 사진들을 보면서 옛 일들을 생각합니다. 나도 금년에 80이고 이미륵 박사도 생존해 있으면 86세로 얼마든지 살아있을 나이인데 뭐가 그리 급해서 먼저 가셨는지 안타깝다”고 하였다. 그것이 1985년 2월 10일자 편지였다. 1999년 3월 ‘이미륵박사탄생100주년기념행사’ 준비 때 KBS 방송국 취재진과 함께 할머니를 댁으로 찾아뵙고 취재진과 인터뷰를 나눈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때 할머니는 94세라고 하였으며, 그 이듬해 할머니는 95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고 들었다.

 

 

 

2) 힐데 볼게무트 (Hilde Wohlgemuth; 1907-1994)

 

1972년 가을 가우팅(Gauting)에 사는 리나 자이처 할머니를 방문했을 때 많은 얘기들을 듣다가 그래펠핑에 살던 사람으로 이미륵과 자주 만난 분이 누구였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친분이 있었던 분이야 무수히 많지만, 그 중에도 서점을 경영하던 ‘힐데 볼게무트(Hilde Wohlgemuth)’ 할머니가 가장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고 하면서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Hilde Wohlgemuth, Sudetenstrasse 6, Gräfelfing, 전화: 852109. 어느 날 전화를 드리자 연로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로 우선 필자소개를 하고, 용건을 말했더니 너무나 반가운 일이라고 하면서 언제 그래펠핑이나 근방에 오는 일이 있으면 미리 연락을 주고 집에 꼭 들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해 10월초 어느 날 우리 집 식구 셋이 묘소참배를 마치고 힐데 볼게무트 할머니댁을 방문하였다. 집은 정원이 잘 가꾸어진 아담한 시골 단독주택이었고, 자녀들은 모두 출가하여 할머니 혼자 살고 있었다. 준비했던 차(茶)를 내놓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볼게무트 할머니는 전후에 그래펠핑에서 서점을 경영하였으므로 그곳이 비록 작은 도시였지만 알고 지내던 사람이 비교적 많았다고 한다. 그녀는 당시 각계 지식인들과의 교분이 많았으나 이미 오래 전의 일이라 그 사람들의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고 하면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1946년 어느 날 독문학자인 쿠르트 브렘 박사 (Dr. Kurt Brem)와 이미륵이 서점을 찾아와 이 지역에 사는 문인들을 중심으로 일주일에 한번 정도 모여서 발표회며, 토론회같은 것을 하고 싶은데 장소가 마땅치 않아 걱정이라며 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다. 당시는 종전 직후라 지성인들의 새로운 지식에 대한 욕구와 갈망이 의외로 많아 그래펠핑에만 이와 비슷한 모임이 세 군데나 있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까페같은 곳에서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모여서 특정한 주제들을 놓고 토론들을 하였다. 며칠을 생각한 후 볼게무트 여사는 마침 집에 비어있는 방도 하나 있어 장소를 제공하였다. 그래서 뜻을 같이 하는 지식인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그래펠핑, 수데텐슈트라쎄 6번지” 볼게무트 여사댁에 모여 발표도 하고 토론도 했다고 한다. 매주 월요일에 모인다고 하여 명칭을 “월요대담회” (Montags-Kolloquim)라 하였고, 모임의 주도자는 쿠르트 브렘 박사와 이미륵이었으며, 모임의 자세한 계획과 진행도 대부분 두 사람의 몫이었다고 한다.

이런 계기로 이미륵과 볼게무트 여사는 만날 기회가 자주 있었으며, 또한 서로 가까운 곳에 살았기 때문에 볼게무트 여사의 두 자녀들과도 잘 놀아주는 아저씨같은 존재였다고 하면서 자녀들과 이미륵이 함께 찍은 사진도 한장 주었다. 그 이외에도 이미륵과 볼게무트 여사와의 서신왕래 내용을 보면 이미륵이 서점에서 정기 간행물이나 잡지같은 것을 주문 받아 전달하는 서점일을 간간히 도왔던 것으로 보인다.

 

“볼게무트 여사님, (……) 새로 나온 잡지를 알려줘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제가 직접 여사님께 돌려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 케르쉔슈타이너 (Kerschensteiner) 여사로부터는 지난주에 자신은 세 권만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가 다섯 권을 보냈었으니 두 권은 저에게 돌려보낼 것입니다. 다음 세권에 대한 계산서를 그분께 보내주십시오.

 

Hurrikan 8,00

Macht auf das Tor 3,80

Klaus Hämmerlein 3,60

 

(……)

 

당신의 미륵으로부터“

 

편지 중에 언급된 케르쉔슈타이너 여사는 유명한 게오르크 케르쉔슈타이너 (Georg Kerschensteiner; 1854-1932)의 부인이다. 슈프랭어가 주장하는 문화철학을 지지하며, 독일 교육학의 기본개념을 도야, 정립한 케르쉔슈타이너는 이미륵이 평소 가장 존경하는 독일 학자 중의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륵이 볼게무트 여사에게 보낸 편지가 여러 통 있었겠지만 필자가 추적하면서 찾은 것은 단 5통 뿐이나. 그 편지들은 모두가 무엇인가를 신중하게 의논하고 싶은 절박한 내용들이다. 날자를 기입하지 못한 채 남아있는 편지들은 거의 요양소에 입원해 있을 때 보낸 것으로 보인다.

 

“사랑하는 볼게무트 여사에게, 저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자리에서 일어날 수만 있으면 직접 찾아 뵙고 모든 것을 구두로 말씀드리겠는데 ...... 당신의 미륵”.

 

“(……) 두 주 전부터는 담낭염을 앓고 있으며 아직도 몇 주간은 바깥출입이 안 됩니다. (……) 다시 건강이 회복되면 당장이라도 여사님께 달려가고 싶습니다.”

 

“그간 베풀어 주신 모든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 여러 가지로 지원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추신’: “오늘의 강연회는 잘 진행되었으리라 믿습니다. 모든 분들게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 (1950.3.11.).

(필자주: ‘추신‘ 내용은 월요대담회가 잘 진행되는지 걱정이 되어 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미륵 박사 별세 9일 전 에벤하우젠 요양소에서 생전에 마지막으로 써서 남긴 편지도 볼게무트 여사에게 보내는 것으로 펜을 들기가 너무 힘겨워 에파 크라프트가 환자의 침대 옆에서 듣고 대필한 것으로 읽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사랑하는 볼게무트 여사님, 그간 저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잠시 동안만이라고 제게 와 주실 수 없는지요? 저의 모든 개인적인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여전히 탈진상태여서 베크만 박사는 방문객을 일체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박사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그래펠핑에서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인사가 여사님께 전달되리라 믿습니다. 감사의 뜻을 전하며.

이미륵 (대필)”

 

벡크만 박사는 이미륵의 친구이자 주치의였고, ‘그래펠핑에서의 사건’이란 아버지같은 알프레트 자일러 교수의 비극적인 돌연사를 말한다. 3월 3일 용무가 있어 뮌헨에 나갔던 자일러 교수가 뮌헨 시내 테아티너슈트라쎄에서 갑자기 별세했던 사건이다. (리나 자이처의 증언). 3월 20일은 이미륵이 타계한 날이니, 자일러 여사로서는 한 달에 두 번 씩이나, 그것도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을 잃은 야속한 3월이었다. 이 편지는 이미륵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편지로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하는 작별인사같은 느낌이 든다. 이 편지를 받고 볼게무트 할머니는 즉시 요양원으로 달려 갔다는 말을 필자에게 하였으나 얘기를 더 이상 계속하지 못하고 울컥 치솟는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던지 머리를 옆으로 돌리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는 《압록강은 흐른다》 원본 1권, “월요대담회” 회원들의 방명록, 《아틀란티스》지 몇 부, 신문에 실렸던 《압록강은 흐른다》의 서평 10부, 사진 5매, 자신의 부친인 헤르만 베르너(Hermann Werner)가 파울 메르크(Paul Merk)라는 필명으로 생전에 언론사에서 활동할 때 이미륵과도 가깝게 지내던 친구로서 1947년 5월 9일자《바디쉐 차이퉁(Badische Zeitung)》에 실렸던 “이미륵과 함께 보낸 저녁”이라는 귀중한 기고문 원본을 보여주었다. 자료들의 일부는 기증받았고 나머지는 복사하여 받을 수 있었다. 파울 메르크는 그후 “튀빙어 차이퉁” (Tübinger Zeitung)의 편집국장으로 근무한 바 있으며, 명성이 높았던 언론인이었다는 말을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볼게무트 할머니가 필자에게 편지를 보낼 때면 가끔 이미륵 묘소에 대한 걱정을 하였다. 1974년 8월 15일자 편지에도 “오늘 이곳 지역신문에 묘소수리에 대한 두 광고가 실렸기에 여기에 동봉하니 혹시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하며 신문기사를 동봉해 주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초 《압록강은 흐른다》가 EOS 출판사에서 다시 발간되자 바르바라 불펜(Barbara Wulffen)이 남독신문에 기고한 서평을 보고 1974년 10월 8일자 편지에 ”남독신문에 좋은 서평이 실렸던데 영향이 많으리라 기대합니다“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그 서평 덕분인지 서점에 책을 주문해 놓으면 날개 돋친 듯 팔려서 좋았다는 반가운 소식도 필자에게 전해 주었다.

1987년 여름 필자가 자료수집 때문에 뮌헨에 체류하고 있을 때 스위스에 와서 공부하고 있던 이의선 할머니(이미륵의 큰 누님)의 외증손녀 (이주연)가 할아버지 묘소도 참배하고 또 고마운 분들께 인사도 드릴 겸 독일에 온 일이 있었다. 이양은 그래펠핑에서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볼게무트 할머니에게 도자기 한 점을 선물로 드렸더니 별로 한 일도 없고 도움을 드린 것도 없는데 유족들이 자신을 그토록 기억해 주어서 고맙고 송구스럽다고 하였다.

볼게무트 여사에게는 우타(Uta)라는 딸과 틸만(Tilman)이라는 아들이 있다. 봄이 되면 힐데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이미륵 묘소에 다녀오라고 말씀하신다고 하였다. 자신은 다리가 아파 걷기도 힘들고, 또 가우팅에 사는 리나 할머니도 너무 연로하여 자주 묘소에 올 수 없을테니 자식들에게 다녀오라고 성화를 대었다고 한다. 그렇게 고마웠던 힐데 할머니도 1994년에 별세하였고, 우연인지는 몰라도 안치된 곳이 이미륵 묘소 바로 가까이여서 그곳에 갈 때마다 함께 참배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범우사발행 [책과인생]  2010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