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원(金載元){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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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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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여당(藜堂)

생졸년 1909 (융희 3) - 1990 (1990)

시대 대한민국

본관 미상(未詳)

활동분야 교육/사상 / 학자 / 고고학자, 미술사학자

과거 및 취재

 

이분 김재원박사님의 <여당수필집>에 <이미륵씨>라는 글이 있습니다. 글 내용은 www.mirokli.com 방명록에 수일내로 올리겠습니다.

김재원(金載元)에 대하여.

1909년∼1990년. 고고학자·미술사학자. 호는 여당(藜堂). 함경남도 함주 출신. 학호(鶴鎬)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1927년 함흥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독일 뮌헨대학 철학부에서 교육학과 고고학을 전공, 1934년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34년부터 1940년까지 벨기에 켄트대학 헨체(Hentze, C.)교수를 사사하고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봉직하였다. 광복 후 국립박물관장에 취임하여 1970년 퇴임하기까지 불모지에서 박물관을 육성하였고, 1954년부터 학술원 회원을 지내면서 우리 학술원이 국제학술원연맹(Union Acad ie Internation-ale)의 정식회원으로 가입하는 데 기여하였다.

 

1957년부터 1976년까지 동아문화연구위원회(Harvard-Yenching Institute 서울지부)를 이끌면서 6·25 후의 어려움 속에서 연구비 등을 관리하여 학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문화재위원을 비롯하여 UNESCO한국위원회 위원, 한일회담 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광복 당시 단 한 사람도 한국인 전문가가 없는 박물관에서 미군정 당국과 교섭하여 총독부박물관 책임자이던 아리미쓰(有光敎一)의 귀국을 1년간 연장시키면서 박물관 소장품을 인수하는 한편, 경주 호우총(壺杅塚)을 발굴하여 박물관 직원들로 하여금 고고학적 소양을 쌓게 하였다.

 

이 호우총에서 신라고분으로서는 지금까지도 유일하게 명문(銘文)이 있는 호우가 출토되어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6·25 중에는 서울에 남아있으면서 북측에 의한 문화재 반출을 암암리에 저지하였고, 다시 2차 공세 때에는 미군의 도움을 얻어 문화재를 부산으로 대피 시켰다. 수복 이후에는 문화재의 해외전시 등 활발히 벌인 국제교류로 한국문화 선양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또, 과감한 학술조사를 실시하여 박물관이 연구기관으로서의 기틀을 다지게 하였다. 최초로 감은사지(感恩寺址)와 금강사지(金剛寺址)를 발굴하였는데, 감은사지의 발굴조사보고서 《감은사》는 한국일보 출판문화상을 수상하였으며, 7년에 걸친 지석묘발굴조사를 거쳐 간행된 《한국지석묘연구》는 3·1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이들 보고서는 지금까지도 발굴조사보고서의 규범이 되고 있다.

 

1965년 대한민국 학술원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하여 《Treasures of Korean Arts》(金元龍과 공저)로 5·16민족상을 수상하였고, 《한국미술》(金理那와 공저)은 영어판·일어판으로도 간행되었는데, 영어판 《Arts of Korea》는 일본국제문화교류협회의 출판문화상 대상을 획득하였다.

 

또, 진단학회 이사로서 《한국사》 간행을 적극 추진하여 방대한 업적을 완 성하였고, 그밖에도 《단군신화의 신연구》 등 많은 저서와 논문을 남겼다.

 

한편, 고고학이나 미술사를 전공하는 학자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국내에서의 훈련은 물론, 부문별로 각국에 유학을 보내 오늘날의 한국 고고학과 미술사학계의 인재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김원룡·윤무병(尹武炳)·한병삼(韓炳三)·이난영(李蘭暎)·안휘준(安輝濬)·정영화(鄭永和) 등이 모두 그 일환으로 외국에 나가 교육을 받았으며, 두 딸인 리나와 영나(英那)가 각기 동양과 서양의 미술사를 전공하였다.

 

항상 정도를 지켜 고집스럽고 엄격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유머도 풍부하였다. 천부적인 외국어실력으로 널리 세계의 석학들과 친분을 맺어 국제인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1970년 국립중앙박물관장 퇴임시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