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일러 교수댁 (1)
1932년도에 자일러 교수댁은 뮌헨시 뉨펜부르크성城 근교의 뇌르틀리헤 아우프파르츠알레(Nördliche Auffahrtsallee) 25번지에 있었다. 이 집안은 본래 아헨시市의 명문가家 로, 남편 알프레트 자일러 박사는 당시 뮌헨의 유명한 ‘알테 피나코텍’이라는 미술관의 판화부장으로 미술 분야에서 명성이 높은 학자였다. 그리고 별장은 뮌헨 교외 슈타른베르크(Starnberg) 호숫가의 베르크(Berg)라는 곳에 있었다. 두 자녀 중 아들 오토(Otto)는 베를린 공대 출신인 엔지니어였고, 사범대학을 졸업한 딸 베르타(Berta; 일명 Mumi)는 슈투트가르트에서 평생 교사로 봉직하다가 1999년경부터는 어느 병원에 입원 중이었으며, 곧 요양원에 이송되리라는 소식을 들은 바 있다. 그 외의 식구로는 집안 살림을 맡아 보던 가정부 리니 자이처(Lina Seizer)가 있었다.
그런데 이미륵은 어떤 계기로 자일러 씨 댁과 인연을 맺고 약 20년간 한 집 식구처럼 함께 살게 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매우 알고 싶어 하는 부분이다. 외동딸 베르타가 음악을 전공한 마르곳 슈미트(Margot Schmitt:1908~?)라는 여선생 밑에서 피아노 개인수업을 받던 때의 일이다.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바이에른 국립도서관 라이스뮐러(Reismüller) 관장의 주선으로 슈미트 선생도 다른 8,9명의 독일인들과 함께 도서관의 공간을 제공받아 이미륵에게서 서예와 중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이미륵은 서예시간에 학생들에게 “글씨는 항상 개뼉다귀 모양으로 써야 해요”라고 하면서 수업을 재미있게 진행하였다고 하였다.(귄터 데본 교수의 증언). 나중에 알았지만 슈미트 선생은 동양문화와 고고학 분야에도 관심이 많았고, 전후에는 포르투갈로 이민가기 전 디아스(Dias)라는 사람과 결혼하여 오랫동안 포르투갈의 ‘문화인류박물관’에 근무한 바 있었다. 디아스 여사도 뮌헨에서 이미륵과 가깝게 지냈고 자료도 좀 갖고 있었으나 전쟁이 끝난 직후 서둘러 이민준비를 하는 와중에 모두 분실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진만 한 장 남았다면서 우편으로 보내줘서 고맙게 받았고, 필자와는 1973년 3월 18일까지 서신왕래가 마지막으로 있었으며, 지금은 생존해 있어도 백 살이 넘어 매우 연로할 것으로 생각된다.
어느 날 슈미트 선생이 피아노를 배우는 베르타 양에게 자기가 아주 훌륭한 한국 선생에게서 중국어와 서예를 배운다는 얘기며, 특히 이미륵의 높은 식견과 인간미 넘치는 인품에 대해 얘기하였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베르타가 집에 가서 식구들에게 그 얘기를 전했다는 것이다. 딸의 얘기를 들은 아버지(자일러 교수)가 “그러면 피아노 선생께 얘기해서 그분을 모시고 어느 주말에 한번 차나 마시러 오라”고 했단다. 슈미트 양은 자기의 친구 엘제 지크문트(Else Sigmundt)와 이미륵을 데리고 1932년 초여름 어느 주말 자일러 교수댁에 가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고 하였다. 다른 얘기도 많이 나누었겠지만 주로 동양문화, 한국의 풍습, 중국문자, 지금 독일에서 하고 있는 일 등이 주제였다고 하였다. 손님들이 집을 나간 후 식구들은 모두 닥터 리李가 “학식이 많고 매우 점잖은 사람으로 보인다”고 칭찬들을 하였다고 전한다.(리나 자이처의 증언).
당시 이미륵은 고정적인 수입이 없었으므로 생활이 너무 어려웠고 힘겨운 때였다고 한다. 이런 그의 사정을 슈미트 양이 전했는지 다른 누가 전했는지는 몰라도 그 얘기가 자일러 부부에게 알려지게 되자, 자일러 교수가 집에 비어있는 방도 있으니 와서 함께 살아도 된다고 전했다고 한다. 너무나 고맙고 뜻하지 않은 제안이었다. 이미륵이 며칠이나 고민하고 골똘히 생각했는지는 전해지는 바가 없으며, 더구나 그가 꾸준히 썼다는 일기장도 모두 소각되었다고 하니 당시의 상황을 알 길이 없다. 어쨌든 이미륵은 며칠 후에 가벼운 짐을 들고 뇌르틀리헤 아우프파르츠알레 25번지에 있는 자일러 교수댁으로 이사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는 이 집 식구가 되었으며, 1936년 경 자일러가家가 뮌헨의 집을 팔고 그래펠핑에 잠시 거주하였고, 그 집 자리에 새 집을 신축하는 동안에도 베르크에 있는 별장으로 이사하여 함께 살았다.
신축된 그래펠핑 아킬린다슈트라쎄(Akilindastrasse) 46번지로는 1937년 봄쯤에 입주할 예정이었다. 식구들이 잠시 베르크에 있는 별장에 살았을 때 이미륵이 자신의 대학동창으로 절친하게 지냈던 안젤름 샬러 박사(Dr, Anselm Schaller)에게 보낸 편지가 그 내용을 설명해 주고 있다.
친애하는 암젤!
(……)금년 겨울에는 내가 (자일러가 식구들 모두도) 슈타른베르크 호湖에 있는
베르크에서 지내고 있다네. 왜냐하면 뮌헨 집이 팔렸고 그래펠핑에 새로
짓게 되는 집은 내년에나 입주하게 되겠기 때문이네. 우리 모두는 숲가에
있는 자그마한 목조건물에서 살고 있다네. 성탄절이 곧 다가오고, 숲 속에서
겨울을 보내게 되어 매우 기쁘다네.
1936년 성탄절,자네의 미륵 씀
* 필자주석: 이 편지 글은 “Mirok Li:Der andere Dialekt”, 97쪽에 실려 있다.
‘암젤’은 ‘지빠귀’라는 새인데 박사의 이름이 '암젤름'이기 때문에 친구들이 이런
아명으로 불렀던 것이다.
베르타의 친구인 헬레네 군데르트 (Helene Gundert)가 코른탈이라는 곳으로 이사 간 후 이미륵과 편지를 서로 주고받은 내용을 보면 그래펠핑의 신축되는 집이 예정대로 완공되지 못하여 1937년 연말에 입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륵이 1937년 11월 23일 얼마 전 베르크를 다녀간 레네 군데르트에게 친필로 보낸 편지의 발송지가 바로 베르크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친애하는 레네에게,
(……)모든 것이 다 너의 명랑한 본성에서 왔으며, 그것은 베르크에 사는 모든
분들과 나를 매우 기쁘게 해줬어. (……).
너의 미륵, 베르크 1937년 11월 23일.
이런 편지들을 종합해 보는 동안 이미륵의 거주지 이동공문서가 발견되어 그래펠핑집으로 입주한 날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이미륵은 1936년 10월 17일부터 1937년 12월 20일까지 약 1년 2개월 간 베르크에 거주하다가 1937년 12월 22일에 그래펠핑의 아킬린다슈트라쎄 46번지로 거주지를 이전하였다. (그래펠핑 시청발행, 공문서).
1937년 12월부터 이미륵은 그래펠핑에서 자일러 댁 식구들과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다급하던 숙소문제와 식사문제가 가볍게 해결되었으므로, 이제 건강만 허락한다면 책을 더 읽고, 여행도 즐겁게 다닐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글도 간간이 써서 발표하고, 또 가까운 친구들과의 교류도 활발하게 할 수 있었던 때였다. 겨울에 땔감이 부족하면 리나와 함께 뒷산에 가서 나무도 해오고, 봄이 되면 텃밭에 여러 가지 야채도 심으면서 부지런하게 살았다고 리나는 그때를 회상하고 있다. 때로는 부엌에 들어가 한국음식도 만들어 선보였다니 자일러 여사는 그를 친아들처럼 대했다는 말이 결코 과장된 얘기가 아니라고 리나는 전하고 있다. 1959년 6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김재원의 ‘이미륵 씨의 생애’에도 자일러 여사와 이미륵의 관계가 실려 있다.
“결국 이의경 씨의 제일 큰 친구는 자일러 부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의지할 데 없는 한국의 불우한 청년을 몹시도 존경하여 자기 집에 데려다
두고 죽을 때까지 돌보아 주었던 것이다. (김재원: 이미륵의 생애. 조선일보,
1959년 6월 3일자)”
이미륵은 친구들과도 바이에른 지방의 전원적인 지역을 찾아 여행을 다녔고, 또 양부모님과도 함께 아르츠바하(Arzbach), 렝그리이스(Lenggries), 프린(Prien), 킴가우(Chiemgau) 등지로 주로 성령강림절에 다니면서 찍은 사진들이 남아있다.
자일러가家가 베르크로 잠시 가 있기 직전에도 이미륵은 친구들과 뮌헨을 벗어나 가까운 곳으로 갈 기회가 있으면 베르크 별장에도 들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1936년 7월 7일, 고향친구인 김준엽金晙燁이 이미륵을 방문했을 때 두 사람은 베르크 별장 근처를 산책하고 나서 “그라프(Graf)”라는 카페에 들러 차를 마시고 방명록에 몇 줄씩 적어 놓고 왔던 일이 그라프―카페의 방명록에 남아 있다. 김준엽은 카페 주인 그라프 여사를 “호인자好人者”라고 칭찬하는 말을 한글로 몇 자 써 놓았고, 이미륵은 당시唐詩 중에서도 산서성 태원太原 출신 왕유(王維, 699~759)의 ‘이별의 노래’ 일부를 한자로 적어 놓았고, 밑에는 자신의 이름을 ‘李未力’이라고 한번 다르게 써본 것으로 보인다.
勤 君 更 進 一 盃 酒 (임이여 술 한 잔 다시 마시고 떠나시라)
西 出 陽 關 無 故 人 (관문을 나서면 누가 있어 또 찾으리)
1936년 7월 7일 李 未 力
1938년이면 자일러가家가 그래펠핑으로 다시 입주한 다음 해이고, 5월이면 첫 번째 맞는 봄이다. 베르타의 친구로서 코른탈로 이사 간 헬레네 군데르트 여사로부터 안부편지를 받은 이미륵은 1938년 5월 30일자로 그래펠핑에서 큰 근심없이 편안하게 지내는 하루 생활을 적어 보낸다.
“친애하는 레네에게,
(……) 나는 자리에 누워 한숨 자고 식사를 하라거나 차를 마시라고
누가 나를 부를 때까지 잠을 자는 거야. (……).”
이때쯤에는 형편이 좀 좋아지고 여유도 있어 보이는 생활이 그려져 있는 내용이다.
이렇게 이미륵은 자일러 댁의 한 식구요, 알리체 여사 (자일러 교수 부인)의 입장에서는 식구가 하나 더 늘었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흡족한 생활이 지속되었다. 여러 면에서 여유를 찾은 이미륵은 이 집의 어느 공간에 암실도 만들어 놓고 여행 중에 찍은 사진들을 자신이 직접 인화하여 친구들에게 보내 주었다고 한다. 이제 그는 걱정없이 책을 열심히 읽으면서 집필 작업에 전념하려고 하였다. 이런 시도를 구상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자일러 가에서 찾은 자유로운 분위기와 편안한 공간이 없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30년대 초반에 발표된 습작들은 그가 아직 슈바빙 지역에서 일정한 직업도 없이 생활에 쫓기면서 집필하였기 때문에 문단에서 아직 융숭한 대접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1932년 경 자일러 교수댁에 자리를 잡은 후로는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문학에 대한 인식과 시야가 넓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문학이 보편적인 인간체험과 역사적인 면들을 포괄한다고는 하지만 개인이나 사회의 특수성이 깔려있지 않은 보편성은 공허하다는 평을 받을 수 있다. 다행히 이미륵의 초기 작품들에서는 독일어로 쓴 한국인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여 그가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소재들이 국민성과 역사성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2년 이전에도 그는 간간히 단편들을 독일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했으나, 자일러 댁으로 이사한 이후로는 작품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1933년에 발표된 것만도 《혼동(Verwechselung)》,《유럽을 잘 아는 사람(Europakenner)》,《한국의 종교(Religionen in Korea)》등이 있고, 1935년에는 취리히에서 발간되던 《아틀란티스(Atlantis)》라는 문예지 6권과 7권에 《수암과 미륵(Suam und Mirok)》이라는 소설형식의 작품이 발표되었다. 시기적으로 보아 1934년 이후에 문예지나 신문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자일러 댁의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집필,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이미륵 자신은 약 30년 간 외국인으로서 독일에서 생활하는데 힘겨운 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가 남긴 글들에는 나치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내용과 전쟁의 포화 속에서 자유와 평화를 갈구하는 장면은 많은 편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가 왜경을 피해 중국 여권을 갖고 망명하였기 때문에 소극적으로라도 감시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미륵의 제자인 롯테 뵐플레 박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미륵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일러댁의 보호를 받았다”는 것이다. (KBS, 수요기획, 1999년 6월 16일).
범우사발행 [책과인생] 2010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