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에곤 베른하르트 베너
2. 후원자 베너, 사진 에피소드
베너 자신은 직접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는 독일에 있을 때 당시 이미륵의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친구 몇몇과 더불어 중국어 공부를 계속하면서 수강료를 지불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베너가 이미륵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흔적이 여러 곳에 보인다. 이미륵이 1940년 11월 22일 베너에게 보낸 편지에는 “돈이 없으니 좀 보내주게!(Schicke mir doch etwas Geld, da ich nichts bei mir habe!)”라는 부탁을 한 일도 있었고, 1941년 1월 12일자 편지에는 “편지 두 통과 돈도 보내줘서 고맙네!(Der andere Dialekt)”(113쪽 참조)라는 말이 있고, 1941년 9월 29일자 편지에는 “이번에는 돈이 어떻게 뮌헨에서 왔지?(Der andere Dialekt)”(122쪽 참조; 당시 베너는 해군에 입대하여 근무지가 빌헬름스하펜이었음)라는 내용이 있다. 베너 자신도 그날 필자와의 대화 도중 옛날에 자기가 그를 조금씩 도와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라며 말을 조심스럽게 아꼈다. 그런데 이런 금전문제가 언급되는 글은 다른 지인에게 쓴 편지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역시 베너가 진정한 후원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전쟁 말기와 전후에 독일의 경제사정이 어려워 사람들이 식량난을 겪고 있을 때에도 베너는 이미륵에게 잊지 않고 간간이 먹을거리를 보내주었다. 1941년 6월 8일자 이미륵의 편지에 “생선통조림을 잘 받았네”라는 말이 있고, 베너가 보내준 통조림(1941.1.17), 내용물은 언급되지 않은 소포(1947년 성령강림절), 차(茶, 1947.12.9) 등을 받고 고마움을 표시하는 글들이 있다.
이미륵은 특별히 산행과 사진 찍는 일을 취미로 삼고 있었으며, 시간이 나면 비교적 가까운 아르츠바하(Arzbach)나 그 근교에 가서 쉬고, 때로는 카이저벤델(Kaiserwendel)로 등반하여 사진 찍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1941년 6월 8일 베너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들이 산행과 사진 찍는 일을 얼마나 좋아 했는지 쉽게 엿볼 수 있다, “지난 성령강림절에는 자네가 카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브루노와 함께 바트 퇼츠(Bad Tölz) 근교의 아르츠바하를 다녀왔네. 우리는 사진 찍는 일에 몰두하기 위해 그곳으로부터 경치 좋은 곳으로 산행을 많이 했었지. 아무 계획도 없이, 아무런 강요도 받지 않고, 기분 나는 대로, 곧바로 발길 닿는 대로 가보는 것도 좋았다네.”
그 몇 년 후에도 편지를 쓰면 자주 산행 얘기가 언급된다. 함께 산행을 다녔던 벗들과의 추억도 아름답고, 건강에도 좋으니 취미로는 최고로 꼽히는 것이 산행임을 부정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지난겨울 내내 새로 나온 여행안내서(Baedeker)를 들고 멋진 등반을 했으니 이번 여름도 아무런 재미없이 보내지는 않을 걸세. 자네 없이는 정상까지 등반하는 것을 감히 시도할 수가 없어. 그러나 새로운 알프스 지역으로 위험이 따르지 않는 산행은 즐겨 할 수 있어.”(1944년 6월 3일 베너에게 보낸 편지).
사진 찍는 일을 너무 좋아하여 아무데서나 마구 찍다가 이미륵이 한번은 큰 변을 당할 뻔 하였다고 한다. 당시에 베너가 에두아트에게서 들었다는 에피소드는 오랜 동안 웃음거리로 남아있다. 1930년대 말 히틀러의 독재가 기승을 부릴 때 어느 날, 이미륵은 사진기를 들고 시내 중심가로 나갔는데 갑자기 군인들이 행진하는 것을 보고 무심코 사진을 찍다가 즉석에서 비밀경찰관에게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는 경찰서에까지 끌려 가 몇 시간 동안 조사를 받을 때 독일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오랜 조사 때문에 짜증이 난 경찰관들이 “저 녀석 아마도 바보인가 봐, 저런 멍청한 놈, 그냥 내보내 줘!” 하면서 석방시켰다는 것이다. 이미륵은 경찰서에서 나와 바로 그 길로 브루노와 에두아트를 찾아가 배꼽을 쥐고 웃으면서 “바보 같은 경찰관들, 내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고?(......)”라고 하면서 경찰관 골탕 먹인 얘기를 하였다고 한다.
이미륵이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951년, 베너는 뮌헨에서 에파를 찾아 그녀가 살던 텡슈트라쎄(Tengstrasse) 40번지와 라이트모어슈트라쎄(Reitmorstrasse) 25번지를 찾아 갔었으나 아무도 없어서 허탕치도 말았다고 하였다. 그때 그가 에파를 찾아간 이유는 이미륵의 유품 중 서재에 있는 책들을 함께 정리하자는 연락을 받고, 혹시라도 잊혀진 원고를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1973년 2월 18일자 편지).
베너의 부인 마야(Maja)는 남편보다 먼저 스웨덴으로 떠난 것으로 보인다. 이미륵이 스웨덴으로 떠나려는 마야에게 1940년 6월 26일 사진과 함께 편지를 보냈다: “고맙고 사랑스러운 기억을 가지고 당신과 베른하르트에게 내가 현상한 사진을 한 장씩 보냅니다. 이 사진을 받아보고 조금이나마 기뻤으면 좋겠습니다.(......) 스웨덴으로 좋은 여행하기를 빕니다."
마야가 떠나고 난 후 이미륵도 스웨덴어를 조금 배웠는지 1941년 11월 6일자 마야에게 보내는 편지 서두에 스웨덴말로 간단한 인사를 몇 마디 전했다. : “친애하는 마야, 안녕, 잘 지내고 있겠지요? 이곳은 눈이 내리고 있어요, 안개도 심하고 날씨도 추워져서 나는 방에 앉아 당신 생각을 하면서 스웨덴어로 몇 자 써보는 겁니다.(……) 안녕!”
베너는 이미륵과 친분을 가지면서 한국에 대해, 특히 인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87년 12월 18일자로 베너가 필자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옛날에 이미륵과 자주 만날 때 그를 통해 인삼도 선사받았고, 그것을 소주병에 담가 두었다가 마신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베너는 북유럽에서 손꼽히는 우표수집가로서 엄청난 거부로 보였다. 집에 정리되어 있는 우표 캐비닛이 두 개나 되고, 나머지 전시용 고가의 우표들은 모두 보험회사엔가 어디에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자료들을 넘겨받고 흥분된 상태에서 근방에 있는 식당에 나가 점심을 함께 먹고, 우리는 앞에 보이는 해변으로 산책도 하고 또 시내관광도 조금 하였다. 베너는 나중에 집을 정리하면서 자료를 더 찾게 되면 우편으로 보내 주겠다는 따뜻한 말도
덧붙였다. 베너는 다음 날 또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 있다고 하여 필자는 그와 작별하고 호텔에서 하루 더 자고, 토요일 아침 7시 기차로 스톡홀름에 가서 책에서만 보던 명소들을 만족스럽게 관광하였다. 그곳에서 이틀 정도 쉬고 뮌헨으로 내려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너무 피곤한 여행이었지만 베너에게서 받은 수십 통의 편지를 기차 안에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읽고 또 읽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흥미가 있었으며, 읽을수록 이미륵의 빼어난 독일어 실력에 재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너는 실로 의리가 있고 정겨운 신사였다. 그는 이미륵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미륵 묘소관리도 걱정하고 있었다. 1989년 2월 20일자 편지에는《압록강은 흐른다》가 한국어로도 출간되었느냐고 묻기도 했다. 아마 그곳에서 그 책을 찾는 한국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1993년 3월 5일자 편지에는 자신의 건강이 매우 나빠졌으며 시력과 청력까지도 좋지 않으며, 곧 100세가 되니 조용히 잠들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필자는 에곤 베른하르트 베너와 1972년 12월경부터 귀국 후 1993년까지 근 20년간 줄기차게 서신 왕래를 하여 필자가 받은 편지만 무려 60통이나 된다.
범우사발행 [책과인생] 2009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