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연속
(1) 롯테 뵐플레 박사 (Dr. Lotte Wölfle)
1965년 필자는 독일 장학금을 받아 뮌헨으로 공부하러 떠났다. 2년간의 슈프라하 디플롬 과정을 마치고, 1967년에는 대학에서 박사과정에 들어가, 지도교수를 정하는 문제, 어떤 과목을 전공, 부전공으로 정하는가 하는 준비 때문에 늦깎이 학생에게는 힘겨운 시기였다.
그런데 어느 날 문헌수집 차 대학 뒤의 서점들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아말리엔슈트라쎄 65번지에 있는 <뵐플레(Wölfle)>라는 고서점에 들르게 되었다. 한참 책들을 뒤적거리는데 주인으로 보이는 약 50세 되었을까 부인이 필자에게 “실례합니다만, 혹시 한국분이 아니십니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렇습니다”라고 했더니 매우 반가운 표정으로, “그렇지요, 맞지요? 여러 해 전에 저희들에게 한자와 서예를 가르쳐 준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바로 한국 분이었어요.” 그래서 “그게 도대체 누구신데요?” 했더니 “이미륵 박사라고 아주 훌륭한 분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부인은 롯테 뵐플레 박사(Dr. Lotte Wölfle)라고 뮌헨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여성이었고, 1930년경부터 부친이 경영하던 고서점에 나와 도와드릴 때 이미륵이 서점에 자주 찾아와서 그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고 했다. 1931년쯤인가부터 국립도서관장이었던 라이스 뮐러의 주선으로 8, 9명이 이미륵으로부터 한자와 서예를 배웠으며, 그중에는 중국학 교수가 된 뢰어(Löhr), 피아노 교사였던 마르곳 슈미트 등이 있었다고 전했다.(1972년 5월 25일 뵐플레 박사와 정규화의 인터뷰).
그 이후로 이미륵이 별세한 1950년경까지 약 20년간 이미륵을 서점과 뮌헨대학 주변에서 자주 만나 얘기도 나누는 사이였다고 한다.
우연이라고 할까, 인연이라고 할까! ‘이미륵’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필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석고처럼 멍하니 서서 그 서점 주인만 바라보았다.
“이미륵 박사가 뮌헨인가 아니면 이 근교에 사시다가 작고하셨다지요? 혹시라도 그분이 사시던 댁의 후손들을 찾는 방법이 없을까요?”
필자의 즉흥적인 반응이었다.
친절한 뵐플레 여사는 즉시 책상 위에 놓여있던 전화번호부에서 독지가의 아들인 자일러(Seyler) 가家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찾아서 메모지에 적어주었다: ‘오토 자일러, 뮌헨, 베얼레슈트라쎄 30번지(Otto Seyler, Wehrlestrasse 30, München)’였다. 그 주소를 받고 나니 어쩐지 이미륵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열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인 1967년 가을이었다. 자일러씨 댁에 몇 차례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신호는 가는데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그 당시 필자는 학교일로 매일 바빴고, 또 겨울이 다가와 한인회의 망년회 준비로 분주했던 나날로 정신이 없을 때라 더 이상 전화는 할 수 없었다.
(2) 오토 자일러 (Otto Seyler)
얼마 후(1967년 10월 경) 오토 자일러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본인 소개와 이미륵에 관해 관심이 많으니 한번 찾아뵙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의사를 전했다. 당시에 필자의 집엔 전화도 없었고, 또 이 추적 작업을 계속하려면 녹음을 하지 않는 한 ‘편지’로 근거를 남겨놓는 것이 좋다는 독일친구들의 말을 듣고 서툰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고 나서 몇 달이 지난 후에 자일러로부터 회신이 왔다. 보내준 편지를 휴양지에서 잘 받았고, 이미륵이 1950년에 별세한 후 한국인들과는 별로 접촉이 없었는데 참 기쁘다면서 바로 그 다음 주말에 필자 내외를 뮌헨의 자기 집으로 초대하는 것이었다. (1968년 3월 26일 퓌센에서 보낸 편지).
필자의 편지를 받고 뮌헨으로 올라와 자료들을 두루 찾아보고 있는 중인데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니 기다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1968년 4월 초 어느날 오토 자일러 댁을 방문하게 되었다. 오토 자일러는 독지가인 알프레트 자일러 교수(미술)의 아들이다.
소박한 오토 내외는 우리 내외를 아주 친절히,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응접실에 들어가 앉았는데 도대체 무슨 얘기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토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물론 이미륵과 한 집에 오랫동안 같이 살았지만 대학을 다니던 동안, 그리고 졸업한 이후에도 직장 관계로 집을 떠나 있었던 기간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이미륵에 관해 아주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필자에게 사진 40여 매, 《이야기(한국민담)》의 초고 몇 부, 《아틀란티스(Atlantis)》라는 문예지 몇 권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는 《무던이(Mudhoni)》라는 중편소설도 실려 있었는데, 이것은 자일러 교수의 부인인 알리체 여사(1958년 사망)의 허락으로 《아틀란티스》지 1952년 8월호와 9월호에 실렸었다.
이 작품은 필자가 번역하여 국내 《문학사상》지 1974년 3월호(제18호)에 실린 바 있다. 그 이외에도 《압록강은 흐른다》의 서평, 단편들이 실렸던 신문과 잡지 등의 이름, 그리고 기억에 남아있는 이미륵과 교분이 있었던 지인들의 이름도 알려 주었다. 나머지 습작들과 단편들이 실린 《아틀란티스》지들은 나중에 고서점 주인의 도움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그날 받은 자료의 일부는 복사하고 나서 돌려주기로 하고 소중한 자료들을 처음으로 수집하였다. 이 자료들과 정보는 물론 흡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그 오랜 기간에 가까이 지내던 지인들과 숨겨져 있는 자료들을 어떻게 찾을 수가 있겠는가! 차(茶)를 함께 마시고 나서 오토는 《압록강은 흐른다》의 초판 원본(1946년 판)에 기증문까지 써서 선물로 주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고맙고 매우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이렇게 접촉이 시작되어 오토 자일러와 필자는 1967년부터 근 30년 이상 서신왕래가 계속되었다.
그때 이름을 알게 된 사람이 오토의 여동생에게 피아노를 지도하던 마르곳 슈미트, 뮌헨에서 1930년대부터 친하게 지내다 스웨덴으로 이민 간 에곤 베른하르트 베너, 주치의 페터 벡크만 박사, 장학사 엘제 지그문트, 제자이며 가깝게 지내던 에파 크라프트 등이다. 그리고 《함부르거 프렘덴블라트 Hamburger Fremdenblatt》, 《아틀란티스 Atlantis》, 《디 다메 Die Dame》, 이미륵이 발행인으로 되어 있었던 《슈팀멘 데어 커 Stimmen der Völker》라는 잡지에 이미륵의 글이 실렸으며, 당시의 독일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압록강은 흐른다》의 발췌문이 실렸다는 말을 듣고 자료추적에 뛰어들기 시작하였다. 대학에서 써야 되는 논문은 제쳐놓고 무모하게 이 자료추적에 뛰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갈등도 생겼지만, 뮌헨 국립중앙도서관 자료실의 마이어 박사의 협조와 평소 가깝게 지내던 독일분들의 도움이 용기를 주었다.
그리하여 1968년부터 생전에 이미륵을 알고 지내던 분들과 서신왕래를 하며 그분들을 방문하여 자료 수집을 하였으나 대학에서 학위논문 제출 전에 이수해야 할 여덟 과목의 세미나 아르바이트를 위한 준비 때문에 1971년 봄까지는 그 일을 활발하게 진행할 수 없었다.
범우사발행 [책과인생] 2009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