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헬레네 군데르트 (Helene Gundert, 1913~?)
필자가 이미륵 추적 작업을 하는 수십 년 동안 직접 만나서 증언을 들을 기회를 놓쳤던 사람 중 하나가 헬레네 군데르트 (Helene Gundert) 할머니이다. 그녀는 묘하게도 그 많은 우연의 그물을 비켜 검색대에 오랫동안 띄지 않았다. 그러다가 필자가 이미륵의 지인들을 찾기 시작한지 32년 후인 1999년에야, 그것도 직접 만나지 못하고 중간에 다리를 놓고 서신으로 연결되어 교류가 시작되었던 좀 색다른 경우이다. 늦게나마 그녀로부터 의미있는 정보와 자료들을 받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1999년 3월 “이미륵박사탄생 100주년기념행사”를 독일(뮌헨)과 국내에서 마치고 난 몇 달 후 처음 보는 젊은 독일청년이 학교 연구실로 필자를 찾아 왔다. 그는 독일 존트하임(Sontheim)에 사는 노베르트 라트리히(Nobert Lattrich)라는 사람으로 뮌헨의 모 회사에 다닌다고 하였고, 함께 온 부인은 한국 여성이었다. 독일에서 누군가로부터 이미륵에 관한 이야기와 필자의 이름을 듣고 여행차 서울에 왔던 기회에 필자를 찾아왔으며, 혹시 필자가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으면 구경하고 싶고 이야기도 듣고 싶다고 하였다. 자신은 작가는 아니지만 가끔 이런 저런 습작들과 동양문화에 대한 글을 써서 지역신문 같은 곳에 실리기도 한다고 하였다. 얘기를 듣고 보니 그는 한국에 대해, 특히 이미륵에 관해 관심이 많아 보였다. 필자는 그날 오후 그를 데리고 국립중앙도서관 고전운영실로 데리고 가 ‘이미륵코너’에서 자료의 중요한 부분을 안내한 후 설명도 해주고, 또한 필요한 자료는 복사도 하여 주었다. 약간 놀란 듯한 그는 이런 자료들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하며 매우 기뻐하면서, 또 이렇게 정리되어 있어 매우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그는 슈투트가르트 근교의 코른탈(Korntal)에 사는 헬레네 군데르트 할머니를 알고 있는데, 이 할머니는 슈투트가르트에 사는 자일러 교수의 딸 베르타(일명: 무미)와 어려서부터 친구이고, 이 할머니와 이미륵도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던 사이로 알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군데르트 할머니를 잘 안다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 할머니가 이미륵에게서 받은 편지 몇 통을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헬레네 군데르트 할머니는 이미륵과 가깝게 지내던 사이로 ‘헬레네’의 약자인 ‘레네’로 불리던 사람이다. 한국 여행을 마친 라트리히는 독일에 돌아가자 마자 코른탈로헬레네 군데르트 할머니를 직접 찾아 가 필자가 보내준 “이미륵박사탄생 100주년기념” 도록과 여타 유고집을 전했다고 하였다. 라트리히가 군데르트 할머니를 만나 이미륵에 관한 얘기를 듣고, 그 내용을 대략 다음과 같이 압축하여 필자에게 보냈다. (1999년 5월 1일자 편지). “그는 (이미륵) 고향으로 돌아가고는 싶었으나 실망될 것이 두려워 갈 수 없었다. 그곳에 가면모든 것이 변해버렸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미륵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으나 떠나야만 했던 고국이 그의 기억에 남아 있던 모습 그대로가 아닐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 그가 자일러 댁에 살 때 일주일에 한 번은 한국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그는 부엌에서 음식 만들기를 좋아했고, 식사할 때도 가끔 젓가락을 사용하는 것이 신기하게 보였다. 한번은 쌀밥에 소고기를 넣어 김밥을 만들어 먹은일도 있었다. (……) 친구인 무미(베르타의 아명)와 내가 15,6세 쯤 됐고, 미륵은30세쯤 됐을 때, 그가 우리를 데리고 뮌헨의 10월축제(Oktoberfest)로 안내한 일이있으며. 그곳에서 우리는 하체가 없는 여자도 보았다. (……) 미륵은 사진촬영을 매우 좋아했고, 나는 가끔 암실에서 사진을 현상할 때 그를 도와준 일도 있었다.” 이 편지를 받은 이후 1999년 5월 20일부터 필자는 이 할머니와 서신왕래를 시작하였다. 본래 군데르트 할머니는 1930년대부터 뮌헨에 살면서 자일러 교수의 딸인베르타와 아주 절친한 친구가 되어 그녀를 통해 이미륵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륵을 얘기할 때 자일러가家를 빼놓을 수 없으니, 그 이유는 어려운 형편에 있었던 이미륵을 자일러 내외가 데려다가 구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군데르트 할머니는 뮌헨에 살 때 이미륵이 사는 그래펠핑에도 자주 놀러 왔고, 슈타른베르크호근교의 베르크(Berg)에 있는 별장에도 놀러가 산책도 함께 다녔다고 한다. 그녀는 1999년 5월 말 필자에게 보낸 편지에 “우리는 친구 사이였어요, Wirwaren Freunde."라고 하면서 필자가 모든 자료를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했다는 말을 듣고, ꡒ나도 미륵의 편지들이 소실되지 않도록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ꡓ라고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이미륵으로부터 받은 8통의 편지 원본을 모두 필자에게 보내주었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선물로 스웨덴에 사는 에곤 베른하르트 베너로부터 선물로 받은 32통의 편지 다음으로 많은 소득이다. 그래펠핑의 집을 신축하는 동안 이미륵이 자일러 가족과 함께 잠시 베르크의 별장에 가서 살 때 그곳을 다녀간 레네에게 1937년 11월 23일자로 보낸 편지가 흥미롭다. “우리는 지금 너의 얘기를 하면서 너를 생각하고 있어. 나는 특히 호숫가의조용한 길을 걸을 때면 고마운 생각을 하면서 그 때를 회상하고 있어.” 그래펠핑에 신축하던 집이 완공되어 새집에 입주한 후 그는 레네와 함께 튀링엔,프랑켄 지역, 크로나하, 바이마르 등지를 여행하였다는 내용이 1938년 4월 10일자 편지에 실려 있다. “이제 나는 그래펠핑에 돌아와서 여행 중에 찍은 사진들을 현상했어. 너에게 보내주고 싶었던 몇 장을 뽑아서 보낸다. 튀링엔과 프랑켄 지역을 다녀온 우리의 여행이 얼마나 즐거웠던지. (……).” 여덟 통의 편지가 하나 같이 레네가 이미륵으로부터 받은 것들이고, 레네가 이미륵에게 쓴 편지는 단 한 장도 입수하지 못했지만 군데르트 할머니가 필자에게 쓴 대로 ‘친구 사이’였다는 것을 실감할수 있다. 이미륵이 그녀에게 사사로운 사생활까지 써 보낸 것을 보면 두 사람은 서로 가까운 사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 예로 1938년 5월 30일자 편지에는 이런내용도 실려 있다. “지금 뭘하고 있어요?”라고 물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레네의 편지에 대해 이미륵은 자신의 생활을 비교적 상세히 묘사하여 전하고 있다. “(……)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저녁이 되면 심난한 기분으로 사색에 잠겨 온갖 생각에 몰두하기도 하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외로움과 고통을 참아내는 이미륵의 힘겨워하는 모습이 같은 날자 편지에 잘 그려져 있다. “(……) 저녁이 되어 어둑어둑해지면 어딘가에 앉아서 나의 생애와 세상사에 대해, 나의 질병과 현재 생활, 즉 상처받고 파손된 인생의 의미를, 소실되어 버린 나의 유년시절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어. (……)” 그러나 날이 가고 달이 지나 1938년 성탄절에는 조금 밝은 추억을 그 편지 내용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레네에게는 아마도 생을 함께 했던 남자친구가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이미륵과의 사이는 1940년대 성탄절에 접어 들때에도 아주 친근하였다는 느낌을 준다. “약 2주 전 어머니로부터 너와 너의 남자친구 얘기를 듣고 곧 몇 줄 써서 보내려고 했었어. 그런데 어설픈 말들은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 쓰지 못했어. (……).” 여기서 ‘어머니’라고 칭하는 사람은 오랜 동안 자신을 보살펴 준 자일러 여사를 말한다. 문맥으 힘겹게 투병하던 이미륵이 별세하기 약 5개월 전에도 (1949년 10월 25일) 레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건강이 악화되어 고생하고 있는 사실을 전했고, 그러면서도 레네를 위로하고 있다. 아마도 레네의 남자친구가 1949년 10월 중순 경 별세했다는 소식을 자일러 여사로부터 듣고 쓴 편지로 보인다. “슬픈 소식을 받고도 곧 편지를 쓰지 못해 가슴이 아파. 위로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어머니가 쓰는 편지에 조의문을 첨가해 달라고 부탁해야 할 것 같아. 나는 아직도 중환(협심증)에 시달리고 있어. 살아보려고 필사적으로 투쟁하고 있는 중이야. 주사와 진통제의 힘으로 겨우 발작에서 오는 고통을 막을 수 있어. (……)이 편지에다는 오로지 네가 혼자가아니라는 말만 전하고 싶어. (……).” (* 필자 주: ‘협심증’은 위암수술 전에 이미간간이 발병하였던 증세로 추측된다.) 군데르트 할머니는 “이미륵은 매우 겸손했고, 항상 안정을 필요로 했다. 그는 자일러 댁을 드나드는 많은 한국인들과 교류가 있었다. 때로는 미륵이 그를 흠모하는 몇몇 여인들에 둘러 싸여 있어서 자일러 교수는 그에게 너무 부담이 가지 않도록조심시킨 때도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하였다.
2) 엘리자베트 샬크 (Elisabeth Schalk) 1959년 서울에서 발간된 월간지《여원》(6월호)에 “이미륵과 함께 보낸 가을”이란 글이 전혜린 번역으로 기고되어 있었다. 이 글을 독일어로 쓴 필자는 본래 엘리자베트 샬크(Elisabeth Schalk)였으나 Elisabeth Schelk로 오기되어 번역도 ‘엘리자베트 셸크’로 되어 있었다. 뒤늦게 그 잡지를 구입한 필자는 1972년 가을 뮌헨에서 ‘Schelk’라는 여성을 찾기 시작했다. 1972년 10월 3일자로 뮌헨 시청 민원실에주소지 확인을 문의했으나 10월 5일 ‘Schelk’라는 사람은 없다고 회신이 왔다. 그런데 며칠 후 집에서 우연히 서류를 뒤집다가 김철수 교수가 오토 자일러에게 보낸편지 복사본에 ‘Schalk’라는 이름이 언급된 것을 발견하였다.” 1932, 33년경에 찍은 두 사진은 위에서 언급한 샬크(Schalk)여사로부터 받았습니다.“ (1969년 12월,김철수가 오토 자일러에게 보낸 편지). 그래서 같은 해 11월 22일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뮌헨 시청에 ‘Schalk’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의하자 11월 27일부로Feilitzschstrasse 27/II.에 엘리지베트 샬크와 언니 마틸데(Mathilde) 샬크가 거주한다는 통지를 받을 수 있었다. 김 교수의 부인 전혜린 씨와 샬크 여사는 뮌헨에서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고, 샬크 여사는 김 교수의 딸의 대모代母라는 사실을 후에알게 되었다. 이미륵은 1928년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간간이 서예지도와 번역 등으로 용돈을벌면서 살아가고 있으면서, 작품을 본격적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뮌헨 근교의 조용한 곳을 찾아 가벼운 산행도 하고, 또 그곳의 조용한 분위기 속에 며칠 머물면서 글도 썼던 모양이다. 그가 즐겨 찾았던 곳은 뮌헨에서 별로 멀지 않은 렝그리이스(Lenggries), 아르츠바하(Arzbach)라는 곳이었다. 엘리자베트 샬크가 기고한글을 보면 그가 1928년 말 경부터 이곳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 우리가그를 만났을 때에는 그는 벌써 네 여름을 이곳에서 보냈다는 것이었다. (……).” 이미륵이 1931년 가을 어느 날 렝그리이스 ‘비히라’ 여사의 통나무집에 혼자 가서 쉬면서 글을 쓰고 있을 때 엘리자베트는 언니 마틸데 (Mathilde)와 친구 프란치스카(Franziska)와 함께 우연히 같은 여사旅舍에 숙소를 정하게 되어 이미륵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인사를 나누고 보니 집도 같은 슈바빙이어서 이때부터 엘리자베트는 거의 20년 간 이미륵과 친교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엘리자베트는 뮌헨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일, 스케치 하는 일, 또 유리알로 장신구를 만드는 직장에 다니면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프란치스카는 1975년 1월 25일필자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들이 이미륵을 처음 만났던 곳은 ‘이자르빙켈(Isarwinkel)’로 기억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침식사를 하면서 찍은 사진 중 좌측으로부터 세 번째 여성이 자신이라고 설명을 붙였다. 자신도 평소에 이미륵을 매우숭배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묘소도 몇 차례 참배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프란치스카가 기억하고 있던 장소를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여원》에 실린 글의 내용을 보아도 그들이 처음 만났던 장소는 렝그리이스이지만 그 지역으로자주 다녔던 이미륵의 안내로 바로 근방에 있는 아르츠바하에서도시간을 많이 보낸 것처럼 보인다. “첫 걸음은 아르츠바하로 하였다. 보기엔 아주 얕아 보이는 시내가, 어떤 때는 소리 높이 파도치며 자갈을 끌고 가는 그 노도와 흐름이 집에까지 들린다고 이야기했다.” (엘리자베트 샬크, 《여원》, 1959년 6월호,343쪽). 이곳에서 이미륵이 간간이 글을 썼다는 사실도 이 내용을 보면 쉽게 알 수있다. “그는 단편을 쓰고 있었으며, 이 소설의 주인공, 즉 열정적인 소녀에 알맞은이름에 관해서 우리들에게 의견을 요구하였다.”(344쪽) 뿐만 아니라 그녀들은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대해서 이제까지보다 더 깊은 견해를 가지게 되었고, 그의 구라파 문화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과 가치있는 것에 대한 섬세한 이해에 경탄을 마지않았다”고 하였다. 엘리자베트 샬크 여사는 1972년 12월 18일 필자에게 보낸 편지에 “이미륵과 관계되는 자료들을 찾아 보았으나 사진 몇 장 밖에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미륵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의 이름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라고 하면서 그 이름을 알려 주었다. 그 화가 이름은 에른스트 하이더(Ernst Haider)로서 그래펠핑근교에 있는 플라넥(Planegg)에 거주하였고, 약 20년 전에 그 화가의 나이가 60에가까울 정도였으니 지금은 아마도 80을 바라볼 것이라고 하였다. 또 기억나는 것은전혜린이 1959년도에 귀국하여 이미륵의 둘째 누님 댁에 들려 독일 소식을 전하고자신의 주소를 알려 주어 누님의 손자가 독일로 편지를 보낸 일이 있으며, 그 편지속에 반도호텔에서 리하르트 프리덴탈(Richard Friedenthal)을 만났던 얘기도 있었다고 한다. 영어로 쓴 그 손자의 편지를 받고 엘리자베트는 “친애하는 이정업 씨,(……) 당신은 편지에 독일작가 프리덴탈과의 상봉 얘기를 했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도 당시 독일신문에서 읽었습니다. 세상이 참 좁지요! (……).” (일지미상)라는 회신을 보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트는 프리덴탈의 방송내용의 정확치않은 부분을 지적하여 1960년 4월 20일자로《바이어러숴 룬트풍크》에 보냈다. “방송국 직원 여러분, 1960년 4월 19일(화) 교육 프로그램으로 ‘한국에서 온 소식’(35분)이 방송되었습니다. 여기에 잘못된 내용을 지적합니다. ‘이미륵이 독일에온 연도는 1차대전 전 이 아니고 1920년 경,할머니와 함께 왔던 사람은 13살된 소년’이 아니라, ‘21세 된 공대학생입니다(……).” 1973년 1월 19일 샬크 여사를 만나 혹시 전혜린이 이미륵과 관계되는 자료를 갖고 있었는지 문의했으나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 언젠가 필자는 샬크 여사 댁에서 이미륵의 훌륭한 글재주에 대해 언급한 바 있었다. 샬크는 1973년 1월 23일자 필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언어를 멋있게 구사하는것은 그의 노력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재주를 발데마르 본젤스(Waldemar Bonsels)의 작품 속에서 감탄하며 높이 평가했습니다”라고 옛날에 들은 얘기를 전해 주었다. 즉 본젤스의 문학은 사물의 객관적인 묘사에서 떠나 주관적인 인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신비적이고 상징적인 경향을 보인 점에 이미륵은 매력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3월 20일, 이미륵이 별세한 후 몇몇 사람이 신문사에 조사弔詞를 보냈고, 엘리자베트 샬크도 “남독신문”에 조사를 써서 보냈으나 원고가 신문사에 너무늦게 접수되어 편집부에서 미처 처리하지 못하고 아쉽게 반송되었다. 그 글을 필자가 입수하였다. “이미륵과의 작별, (……) 찬란히 빛나는 푸른 하늘, 따스한 태양, 아름다운 이른 봄날. 작고 조용한 공동묘지 한 무덤가엔 만개하여 향기나는 꽃들의 화환들로 둘러쳐져 있고, 그 주위로 벌들이 윙윙거리며 날고 있다. (……) 이미륵은 오래 전에 고향을 떠나 와 그를 따라가는 작은 마을 사람들 중엔 일가친척이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마음을 얻었던 사랑스런 인간, 자신의 내적 부富를 쌓아가는 일에 동참케 한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우리에게 천진난만한 맑은 본성과 아름답고 소박한 인성을 투영한 작품을 선사한 작가의 죽음을 모두가 애도하였다. (……) 엘리자베트 샬크.” 그녀는 어느 편지에는 아킬린다슈트라쎄의 이미륵의 방까지 방문한 일이 있다고전해주었다. 작가가 떠나는 마지막 날, 영결식에 참석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을 엘리자베트의 모습이 새롭게 상상된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고? (……) 아침식사 후에는 집안에서 서성거리다가 누구라도 좀 도와줄 일이 없는가 여기 저기 살펴보고, 때때로 부엌이나 정원에서 할 일을 찾아보기도 하지. 그리고 불안한 마음이 들면 작업을 하다가 일어서서 걷기 시작해. 다시 집안에서 서성거리다가 어딘가에 앉을 때까지 정원과 숲에서 이리저리 걸어 봐. (……) 반쯤은 멍하고 당황하여 잠시 앉았다가 서서히 정신을차리고 뭘 먹거나 차를 마시고 담배를 한 대 피워. 그리고 찻잔과 접시를 부엌으로들고 가서 설거지도 도와 줘.”
리는 내용의 글도 보여 그나마 다행이다. “(……) 아직도 가끔 바이올린을 연주하고있는지? 베르크(Berg)에 와서 네가 들려주었던 아름다운 선율이 아직도 내 귀에 생생하게 울리고 있어. (……).”
로 보아 무슨 일 때문인지 헬레네의 힘든 근황이 보이는 편지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무렵(1944년 성탄) 연합군의 폭격 때문에 불안에 떨던 시기를 작은 도시코른탈에서 사는 레네에게 상세하게 전달하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방공호나 벙커에 들어가 있어. (……) 이러한 세상에 계속 살면서 인간을 위해 일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자문하고 싶어. (……).” 전쟁의 포화 속에서 견뎌야만 하는 현재가 가혹하고, 불안하며 심신이 너무 고달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때의
심경이 엿보이는 글이다. 그러면서도 전쟁말기에 잠시나마 세상을 조금이라도 긍적적으로 보고 싶은 심정도 같은 편지에 담고 있다. “내 마음 속에 더 좋은 시기가 다가오리라는 희망이 서서히 다시 자라나고 있어. 내 얘기는 모든 문화의 가장 고귀한 부분이 새로운 시기로 넘어가 보전돼야 한다는 말이야.” (1944년 성탄절).
(《여원》, 1959년 6월호, 342쪽).
범우사발행 [책과인생] 2010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