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내용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중인 藜堂隨筆集 (여당수필집)의 일부분입니다.
초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셨던 여당 김재원박사님께서 저술한 책입니다.

「뷔르츠부르크」
상해에 와서 얼마동안 체류하였는지 모르나 임시정부의 활동 같은 데도 참가한 일이 있었으며 안중근의사 친척되는 안봉근씨와 동행으로 프랑스 배를 타고 「마르세이유」를 거쳐서 독일에 온 것이 1922년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 그것이 확실히 1922년인지 또는 그보다도 1년 전이나 1년 후인 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즉 이 때를 전후하여 3.1운동 직후 많은 청년들이 상해로 찾아 왔다가 그 곳에서 중국여권을 입수하여 구미(유럽과 미국)로 떠난 인사가 현재도 국내에 많이 계신 까닭이다.
물론 학비가 있어서 독일에까지 간 것은 아니고 안봉근씨가 독일까지 가기만하면 어떻게든지 살고 또 공부할 수 있다고 한 막연한 이야기를 신용하고 온 것이고 독일에 도착될 무렵에는 이미 여비가 다 떨어진 후이므로 천주교와 관계가 깊은 안봉근씨와 함께 남독일의 「뷔르츠브르크」(Wuerzburg)시 근방에 있던 모신부를 의지하여 왔다. 세상이 주지하다시피 안중근의사는 천주교독신자이고 또 그 일가가 모두 천주교와 깊은 관계가 있어 안봉근씨도 그러한 관계로 전에도 독일에 왔다 간 일이 있었던 것이므로 다시 그때 신부를 찾아온 것이다.
지금 이야기가 났으니 말이지 이 안봉근씨는 일본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한봉근이라고 이름을 고치고 그 후도 오랫동안 독일에 거주하였으며 이차전쟁 전에는 독일 태생인 부인과 함께 베를린에 거주하여 콩나물을 기르고 두부를 만들어 주로 중국인에게 팔아서 생활을 하였고 「나치」때에는 추방을 당하여 이태리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금은 북한으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안중근의사와 관련된 그 일가의 기구한 운명의 한토막이라 할 수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의경씨나 안봉근씨 모두 상해에서 중국여권의 입수하였으며 여천에 쓰여진 「로-마」자의 이름은 Yiking Li, Fong Ken Han이었다. 이의경씨가
「뷔르츠부르크」에 간 것이 인연이 되었는 지는 모르나 그 후 불과 10여만의 인구를 가진 대학도시에는 당시 6~70여명의 한국유학생이 모여 있었다. 그 때문에 한 때는 그 도시에서는 동양학생이라면 한국사람을 생각하였고 그 후 수 십년 후인 지금은 한 사람의 우리 학생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그곳 시민들은 동양사람을 만나면 다른 도회에서와 같이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 하고 뭍는 일이 없이「당신은 한국사람입니까」라고 묻게끔 되었다고 한다.
이의경씨는 경성의전에서 독일어의 기초는 배우고 간 사람이므로 쉽게 독일어에 능통하였고 따라서 우리나라 학생치고 이씨에게서 몇 시간 독일어 강의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었고 학비도 대개 이러한 독일어 개인교수 사례로 쓸 수 있었다.
당시 독일은 심한「인프레」였으므로 우리나라에서 간 학생들은 불과 얼마 아닌 돈으로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오히려 지나치게 호치한 생활을 한 분도 있었다. 예를 들면 기차 같은 것도 1등이 아니면 타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독일에는 기차에 4등까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학생들의 생활에 변동을 가져온 일이 생겼으니 즉 그것이 독일
「마르크」화의 안정화인 것이다. 이에 따라 갑자기 생활비가 많이 들게 되고 우리나라의 학생의 수도 따라서 격감하게 되었고「뷔르츠브르크」시에도 불과 수명의 한국사람을 남기고는 다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뷔르츠브르크」시는 우리나라 옛적 독일 유학생들의 기억에 길이 남아있을 곳임이 분명하다. 최근 돌아온 모씨가 여행차 그 곳에 갔더니 로상에서 만난 한 독일 청년이 자기의 아버지는 한국사람 K박사인데 그런 사람을 아느냐고 하면서 한국 음악가의 이름을 말하더라는 이야기를 간접으로 들은 일이 있다. 과연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