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파 크라프트 (Eva Kraft) (2)
1947년도 여름 이미륵과 에파 크라프트는 트라운슈타인 (Traunstein) 근교의 루폴딩 (Ruhpolding)이라는 곳에 있는 요셉 클레멘테 박사 (Dr. Josef Clemente)의 집에 가서 며칠을 보낸 일이 있었다고 전해 들은 바 있다.
필자는 1972년 겨울 어느 날 클레멘테 박사의 초대를 받아 루폴딩으로 가는 도중 승용차가 눈길에 미끌어져 강물에 빠질 뻔했던 일을 회상하면 지금도 스름이 끼친다. 1947년 당시에 클레멘테 박사가 그곳에서 이미륵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웃으면서 클레멘테 여사와 무슨 얘기를 나누더니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은 8밀리 짜리 무성 무비필름(흑백)이었으며, 비록 1분 10초 짜리이지만 이미륵의 미소와 움직임이 담긴 유일한 필름이다. 필자는 그 필름의 사본을 클레멘테 박사로부터 선물로 받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가, 귀국 후 NTSC 양식으로 다시 제작하여 강연용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자료는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사실을, 즉 루폴딩 소식을 필자가 알고 있다는 것을 에파가 알게 된 이후로 그녀가 필자에게 더욱 협조적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유고로 남아있던 “이야기”의 원고와 제목들도 알려주고, 또 그 많은 서예품들을 필자에게 빌려 주었기에 일부를 복사할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당시 그녀가 그 서예 자료들을 보고 나서 꼭 돌려달라고 하였기에 거의 그대로 반송하였던 것이 매우 아쉽지만, 복사된 일부 서예품들은 정리되어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49년 경 에파 크라프트는 이미륵의 소개로 암머제 (Ammersee)라는 호수 근방에 위치한 유명한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던 카알 오르프 (Carl Orff)씨의 집에 방을 구해 살고 있었다. 1948년 이미륵이 뮌헨대학에서 강의할 당시에는 두 사람이 더욱 가깝게 왕래하였다고 전하는 독일 친구들이 몇 명 있었다. 1972년 8월 30일 카알 오르프가 필자에게 보낸 편지를 보아도 두 사람이 자주 만나는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 이박사는 우리 집에 자주 왔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 집에 살았던 에파 크라프트 박사와 매우 친하게 지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그녀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혹시라도 그녀를 뵙게 되면 안부를 전해주십시오.”
이미륵은 엄청난 애연가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남긴 사진들을 보면 파이프를 물고 찍은 것이 많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담배를 좋아하는 골초였다는 것이 사실인것 같다.
“어느 집인가는 기억이 가물 가물하지만, 하루는 선생님이 타박(담배)을 잊고 저희 집에 오셨어요. 담배가 없어서 불안해하는 기색이길래 내가 갖고 있던 담배를 권했지요. 이때부터 아주 가깝게 지내게 되었어요. 대단한 애연가였어요. (......)”라고 에파는 당시의 일을 회상하고 있다. (한희옥: 에파는 마지막 생명의 파도였다, 여성동아, 1984년 9월호, 195쪽).
자일러가(家)와의 관계를 서술할 때 언급했듯이 이미륵은 1937년 12월에 그래펠핑에 신축한 집으로 이사하였다. 1946년 이후 엘제 지그문트가 가끔 초대받아 그곳에 가면 “거의 매번 에파가 그 집에 와 다정하게 함께 있었고, 아무리 사제지간이라지만 매우 가까운 사이로 보였습니다”라고 엘제는 전하고 있다.
그녀는 또 한때 이미륵과 자일러 여사의 관계가 서먹 서먹해 보이고 평화롭게 보이지 않아 그 이유를 자일러 여사에게 물었더니 에파 때문에 자신과 이미륵의 사이가 불편해졌다는 답을 자일러 여사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이미륵과 에파가 가까이 지내는 관계를 보고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직감적으로 느끼는 ‘시기심(猜忌心)’인지 아니면 ‘성격차이’에서 오는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엘제는 필자가 만난 이미륵과 친분이 있었던 친구들 중에서 에파를 매우 비판적으로 보는 여성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전하는 말로는 에파가 이미륵에게 수술을 받기 전에 “함께 다른 곳으로 이사가자”고 졸랐다는 말을 집안 식구들과 가까운 지인들이 듣고 모두 심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미륵이 볼프라츠하우젠 병원에서 위암수술을 받고 에벤하우젠 요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엘제 지그문트가 1950년 3월 8일 생일축하 겸 병문안 차 찾아 갔더니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아 산소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며, 그때 에파와 자일러 여사가 환자 옆에서 교대로 병간호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회진 중이던 담당의사가 “당신 회복해서 일어나면 한국에 갈 수 있어요”라고 희망적으로 말하자 옆에 있던 에파가 “그러면 제가 간병인으로 함께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필자에게 전했다. 그 말은 실로 진심에서 울어나온 애정의 표시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환자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으며, 결국 1950년 3월 20일 별세하고, 24일 약 200 여명의 추모객이 애도하는 가운데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래펠핑 공동묘지에서 시신이 운구될 때 에파는 마치 한 집 식구처럼 자일러 여사와 아들 오토 옆에 서서 묘소로 걸어 갔고, 하관하고 나서 쿠르트 브렘 박사 (Dr. Kurt Brem), 안드레 엑카르트 교수 (Dr. Andre Eckardt), 주치의 페터 벡크만 박사 (Dr. Peter Beckmann)의 조사 낭송이 끝난 후에도 에파는 비통한 표정으로 혼자 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오랫동안 관(棺)을 바라보고 있어서 옆에서 보는 추모객들의 마음을 더욱 숙연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때 이미륵을 존경하는 어느 음악인이 바이올린으로 슈만의 “꿈 (Träumerei)”을 구슬프게 연주하자 장례식장은 더욱 엄숙해졌다고 장지를 다녀온 사람들이 전하고 있다.
임종하기 9일 전인 3월 11일, 아직 요양원에서 투병하고 있을 때 이미륵이 마지막으로 쓰고 싶었던 편지를 침대 옆에서 대필한 것도 에파 크라프트였다. 그래펠핑에서 서점을 경영하던 힐데 볼게무트 (Hilde Wohlgemuth) 여사는 바로 이 마지막 편지의 수신자로서 평소에 이미륵을 존경하면서 직, 간접으로 도와준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특히 1946년부터 그래펠핑에 문인들과 지식인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토론하던 “월요대담회”의 장소를 아무 조건없이 제공한 것도 볼게무트 여사였다.
이미륵과 1929년부터 뮌헨에서 가까이 지냈던 김재원은 1959년 6월 3일자 “조선일보”에 “이미륵씨의 생애”를 쓰면서 에파 크라프트를 가볍게 언급한다.
“ - K 양 - 화란출신으로 박사학위까지 가지고 있는 이 사람은 이씨 말년의 아마 제일 사랑하던 애인인 것 같다. 이의경씨 별세 후 비통한 나머지 멀리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편지를 하여 적어도 한국에라도 오고 싶다고 한 일이 있으나 외국 여자를 오라고 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위로하여 만류한 일이 있다. K양은 그 후에 신교에서 천주교로 전교하고 최근에는 일본까지 왔다고 하는데 그 후의 일은 알 수 없다. 아직도 젊은 분이므로 익명으로 두기로 한다. (......)".
이 글이 조선일보에 (1959.6.3) 실릴 때에는 에파가 한국에 못간 것으로 되어 있지만, 바트 퓌싱에서 필자와 대담할 때 (1973.4.29) 에파는 자신이 어느 해인가 한국에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하였고, 엔네 보르네만 여사의 편지에도 한국방문 얘기가 나오고, 그리고 1984년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에서도 “오랫동안 일본에 체류한 적이 있었지만, 한국에는 65년과 70년 초에 잠간씩 다녀온 적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에파 자신이 뮌헨 근교에 거주하는 뮐러 종미 여사에게도 직접 “내가 일본도 갔었고, 한국도 갔었지. 그게 아마 61년인가 63년이었을 거야.” (홈페이지 참조)라고 말한 바 있다. 리나 자이처 할머니도 에파가 이미륵이 1950년 별세한 후 “한국”이라는 곳에 한번 가보겠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이렇게 볼 때 연도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에파가 이미륵이 태어나서 성장했던 한국이라는 나라에 한번 다녀간 것은 확실하게 보인다.
1970년 경부터 에파 크라프트는 마르부르크를 떠나 베를린에 소재한 “프러시아 문화재단 (Preußischer Kulturbesitz)”의 도서관에 근무하고 있었고, 1984년 그녀가 아직 베를린 시립도서관에 근무할 때에는 ‘동아시아분과’의 부책임자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가 바로 그해 서울에서 큰 수술을 받고 오랫동안 병석에 있으면서 대학으로부터는 연구년 허락을 받고 휴양을 하던 때였다. 말하자면 건강을 회복하는 동안 이미륵의 자료추적 작업이 잠시 중단되었던 시기였기에 에파 크라프트와도 서신왕래가 한참 동안 끊어져 있었다.
1999년 3월 이미륵박사탄생 100주년 기념행사가 뮌헨에서 무려 1주일 동안이나 거행되었을 때 에파를 정중하게 초대하였으나 본인은 끝내 그 행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마침 뮌헨 국립도서관으로 전근왔다기에 필자가 집무실로 전화를 하여 꼭 참석해 달라고 부탁했음에도 정중하게 사절했다. 사람들이 자신과 이미륵과의 관계를 ‘연인사이’로 보는 부분에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워 했고 사제간임을 암시적으로 보여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사적인 문제와는 별도로 필자는 에파를 꼭 다시 찾아서 소장하고 있을 것 같은 유품들을 찾아보려고 꾸준히 노력하였다. 왜냐하면 에파는 평생 혼자 살았고, 또 상당히 연로하여 언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독일에 있는 친지들을 통해 그녀의 거주지를 어렵사리 찾을 수 있었다. “에파 크라프트 박사, 야콥 클라라슈트라쎄 11번지, 80796 뮌헨”, 이것이 그녀의 주소였다. 필자는 2005년 7월 15일 장문의 정중한 편지를 써서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와 유족들이 유품과 유고들을 열심히 찾고 있으며, 또한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이미륵 자료실이 별도로 설치되어 있으니 협조해 달라는 내용을 등기로 보냈다. 그런데 불행히도 우편 봉투에는 “야콥 클라라슈트라쎄 11번지에는 에파 크라프트 박사가 거주하지 않음”, “이 주소에는 수신자가 없음”이라는 메모와 우체국의 소인이 찍힌 우편물이 필자에게 반송되어 왔다.
다음 해 어느 날 한국에 휴가차 나온 뮐러씨 내외 (뮌헨 근교 바이어부른에 거주)를 유족대표 이영래 회장과 함께 만나 식사하면서 에파에게 보냈던 편지가 돌아왔다는 얘기를 전했더니 이 두 분이 독일에 돌아가서 에파가 그 주소에 살지 않고 2000년부터 양로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2007년 봄 에파의 건강상태가 너무 나빠 뮌헨의 “엘리자베트 양로원 (Altenheim St. Elisabeth)에 입원해 있다는 것을 뮐러 종미 여사가 추적 끝에 용하게 알아냈다.
뮐러 여사와 이영래 회장은 에파가 입원해 있는 양로원에 직접 몇 차례 병문안도 갔었다. 어느 날 뮐러 여사가 또 들렸더니 에파는 이미 세상을 떠난 며칠 뒤였고, 양로원으로부터 그녀가 2007년 5월 9일 작고하였으며, 유해는 가족들이 베를린에 모셨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젠 이미륵의 옆을 지키다가 임종까지 지켜보던 에파 크라프트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범우사발행 [책과인생] 2010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