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파 크라프트 (Eva Kraft: 1923-2007) (1)
1923년 베를린에서 출생한 크라프트의 원명은 에파 수잔네 크라프트 (Eva-Susanne Kraft)이며, 양친은 본래 네델란드 출신으로 오래 전부터 베를린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베를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베를린대학을 다니다가, 1946년 마르부르크 (Marburg)대학 동양학부로 전학하여, 먼저 일본어 번역관 시험에 합격하고 난 후 곧 중국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1946년 뮌헨대학으로 전학, 학구열이 강했던 그녀는 1949년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중국학, 일본학, 몽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할 정도였다. 박사학위 논문제목은 “중가르 전쟁 때 푸닝장군의 보고서(Berichte des Generals Funning(g) aus dem Dschungarenkrieg)" (뮌헨대 동양학부, 1949년)로서 중국역사와 관계되는 논문이다.
필자가 에파 크라프트 박사를 찾게된 것은 1972년 어느 날 뮌스터에 사는 엔네 보르네만 (Enne Bornemann) 여사가 보내준 편지에 언급된 내용이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뮌헨에서 문부성 장학사로 있었던 엘제 지그문트 (Else Sigmundt) 여사도 만나서 대화를 나눌 때마다 에파 크라프트라는 여성을 만나면 많은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자일러 교수가(家)의 가정부였던 리나 자이처 할머니, 뷔르츠부르크대학 철학교수였던 루돌프 베얼링어 (Rudolf Berlinger) 박사, 뮌헨대학 재학 당시 이미륵의 제자였던 볼프강 바우어 (Wolfgang Bauer) 교수 등 여러 사람이 에파 크라프트를 만나면 정보를 수집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들을 주어 필자도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뮌스터에 살던 보르네만 여사는 주고 받던 편지에 “이미륵과 생전에 가장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에파”라고 말했다. 그리고 에파 크라프트의 근무지와 연락처를 알려 준 사람 중에는 뮌헨 소재 바이에른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던 프란츠 요셉 마이어 박사 (Dr. Franz-Josef Meier)도 있었다. 그 정보를 갖고 1972년 5월 19일 마르부르크 도서관으로 편지를 보냈으나 에파가 베를린으로 전근간 이후라 편지가 뒤늦게 베를린으로 후송되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필자의 편지를 베를린에서 받은 에파와 연락이 닿아 곧 서신을 주고 받기 시작하였다. “(......) 저는 이미륵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준비하는 일에 유용할 만한 자료가 없어서 두렵습니다. 제가 갖고 있던 사진들은 오랜 기간 외국에 나가 있었던 동안 우리 집에서 분실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은 오로지 서예품 뿐입니다. 언젠가 당신께서 베를린에 오시면 보여 드리겠습니다 (......)” (1972년 7월 28일, 에파 크라프트가 필자에게 보낸 편지). 에파가 보내준 편지를 받고 기쁘기도 하였고 약간 실망스럽게 하였다. 그러나 몇 몇 독일 지인들로부터 그래도 자료의 일부는 에파가 소장하고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바 있었기에 계속 접촉하여 보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필자가 이미 에파와 연락이 닿은 후 보르네만 여사는 1972년 10월 4일자 편지에 “이미륵씨의 만년에 가까운 친구였고, 특별히 가치있는 인물이었던 여성의 주소를 제가 압니다. 그녀는 벌써 한국도 다녀오고 일본에도 거주한 바 있었습니다. 한국에 가서 뮌헨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김재원씨도 만나고 왔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에파 크라프트 박사이고 현재 마르부르크 국립도서관에 근무합니다.”라고 써 보냈다. 보르네만 여사가 에파에 대한 정보를 추가로 보충하여 전해준 정보였으나 에파의 근무지가 베를린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모르고 보낸 편지 내용이었다.
에파 크라프트는 1973년 4월 26일자 필자에게 “나는 5월 20일까지 니더바이에른에 와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실 수 있으면 더욱 좋겠고, 그러면 당신이 계획하는 작업에 대해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기쁘겠습니다.” 요양지는 바이에른주이지만 뮌헨에서 제법 떨어진 바트 퓌싱 (Bad Füssing)이라는 곳이며, 이토욕(泥土浴)으로 유명한 온천지이다. 이 편지를 받고 다시 연락을 하여 필자가 에파 크라프트 박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73년 4월 29일, 바트 퓌싱의 요양지였다. 그녀는 건강이 좋지 않아 의사의 처방과 지시를 받고 요양 차 퓌싱에 와 있었을 때였다. 사전에 서면으로 약속을 하고, 뮌헨에서 승용차로 새벽 5시 경에 출발하여 목적지에 도착한 시간은 9시 경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에파를 만나 요양소의 휴게실 옆 벤취에 앉아 인사를 나누고, 그 요양소와 그 지방의 역사에 관한 이런 저런 얘기를 간략하게 듣고 난 후 점심시간이 가까워져서 근방에 있는 ”太平洋酒家“ (Bad Füssing, Friedensweg 3번지 소재)라는 중국 식당에 들어갔다. 식사가 나오기 전에 차를 마시면서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얼마나 이곳에 더 계셔야 합니까?“ 등 안부인사를 먼저 전했다. 그리고 나서 ”에파여사께서는 이미륵 박사를 언제부터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당시를 회상하며 얘기를 시작하였다.
자신은 1946년 베를린에서 마르부르크대학으로 와서 중국학과 몽고어로 유명했던 에리히 해니쉬 (Erich Haenisch) 교수 밑에서 공부하다가, 어느 날 대학식당에서 그분의 아들 볼프 (Wolf)로부터 뮌헨 근교에 중국학은 물론 동양문화 전반에 박학다식한 이미륵이라는 한국분이 계시다는 정보를 듣게 되었다고 한다. 며칠 후 이미륵이 기거하고 있던 그래펠핑의 자일러 교수댁 주소를 들고 자기가 직접 이미륵을 찾아 갔다고 한다. 아랫 층에서 자일러 여사에게 자기는 현재 마르부르크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라고 소개하고, 이미륵씨를 뵙고 싶어서 먼 길을 찾아 왔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중에 이미륵이 2층에 있다가 밑에서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 계단을 내려왔었다고 하며, “그때가 1946년 7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하였다.
에파는 이미륵을 만나 자신의 공부계획을 야심차게 얘기했더니 기꺼이 도와주겠다는 승낙을 받았고, 그 며칠 후 이미륵 앞에서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의 일본어 책을 읽고, 쓰고, 또 한자도 배우면서 서예공부까지 함께 시작하였다고 한다. “글씨연습을 많이 해야 되겠습니다. 나한테 좀 더 배워야 되겠는데요”라는 말이 선생의 첫 마디였다고 한다. 그 이후 그녀는 곧 학교를 뮌헨대학으로 전학하여 동양학부에서 정식으로 강의를 들으면서 공부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에파는 필자가 요양소까지 들고 간 자료들과 지인들의 주소를 읽어보고 나서, 끝으로 수집되어 정리된 200 여매의 사진들을 자세히 보더니 “정말 많이 수집하였습니다. 제가 모르는 사진들과 자료들도 많군요” 하면서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용히 눈물을 닦고 있었다. 20 여년 전까지 이미륵과 가까이 지내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만감이 교차했을 에파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필자도 잠시 당혹스러웠다.
그녀를 만나고 나서 약 1개월 후, 즉 1973년 5월 27일 에파가 필자에게 편지 (카드)를 보내주었다. 바트 퓌싱에서 필자를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자료들을 보고 나서 닫혀있던 마음의 문이 조금 열린 것으로 보여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친애하는 정규화씨, 저를 (요양소까지) 방문해 주셔서 매우 고마웠습니다. 그것 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당신이 계신 뮌헨으로 방문할 수 없어서 유감입니다. 어 쩌면 다음 휴가
때에 방문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요. 원고 두 매와 주소록은 잘 받았습니다. 나에게 브렘
(Brem)씨의 조사(弔詞) 사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 기“의 원고(사본)도 있습니다.
제목들은 별지에 적혀 있습니다. (별지에 이야기 21편의 제목이 적혀 있었음).
에파 크라프트 올림”
뮌헨대학교 동양학부 중국학 설립자는 본래 푹스 (Fuchs) 교수였다가, 후임으로 마르부르크대학에 있던 에리히 해니쉬가 뮌헨대학으로 새로 부임돼 왔고, 1948년부터는 이미륵이 동양학부 조교로 있었다. (Helmut Wilhelm: German Sinology Today. The Far Eastern Quarterly. Vol. VIII. 1949, Nr. 2, 319-322쪽 참조). 이미륵은 1948년 여름학기부터 “한국학 (인종학, 언어, 역사), 맹자, 동양문학사” 등의 강의를 하면서 뮌헨대학교 중국학과를 홍보하고 확장시키는 데 일조를 하였다. 1949년도에는 “츠레츠레구사”라는 강의명으로 일본문학 강의도 하였던 것으로 보아 일본어도 잘 구사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에파 크라프트의 말에 의하면 이미륵이 중국어는 물론 일본어도 잘 했을텐데 강의시간 이외에는 한번도 일본말을 사용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뮌헨에서 에파와 함께 중국학을 공부한 학생으로는 전 뮌헨대학 교수였던 고(故) 볼프강 바우어,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였던 고(故) 귄터 데본 (Günther Debon), 서점주인 롯테 뵐플레 박사 (Dr. Lotte Woelfle) 등이 있다. 젊었을 때의 사진을 보아도 그렇지만, 함께 공부했던 볼프강 바우어 교수의 말을 들어도 “에파는 당시 뮌헨대학교 동양학부 학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었다고 한다.
1948년은 “압록강은 흐른다”가 출간되어 독일문단에서 화제를 일으키기 시작한지 2년 후였고, 또한 이미륵이 작가로서의 입지가 확고해지면서 평론가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을 때였다. 그때 그는 이미 속편 II부와 III부를 집필하는 작업에 전념하고 있었고, 1949년 10월에는 원고의 교정작업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9년 10월 31일, 베른하르트 베너에게 보내는 편지, Der andere Dialekt, 164쪽). 대학에서의 강의준비, 원고집필, 문인클럽 모임 주관 등으로 이미륵에게는 그 때가 무척바빴던 시기였다. “압록강은 흐른다”의 속편을 집필할 당시 옆에서 조언을 하며 타자를 찍어준 사람이 자신었다고 에파는 말하고 있다. 그녀는 “예전에 친구들과 가끔 다니던 아르츠바하로 여행을 갈 때는 저와 함께 가서 산행도 하고, 또 박사님의 집필작업을 도와줄 일도 있었어요”라고 한다. 어쩌다 작품 속에서의 사건의 진행이나 인물들의 성격묘사에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여도 작가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작업을 계속하는 형이었다 한다. “압록강은 흐른다”의 속편을 집필할 때 에파가 원고를 받아 찍었던 타자기는 이미륵이 별세한 후 에파가 보관하고 있을 것이라는 지인들의 추측들이 무성하였으나, 그것을 확인할 방법도 없었고, 또한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혹시 있을 수도 있는 다른 원고들에 비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 보다는 “압록강은 흐른다”의 속편이 탈고되었다고 보는 독일 친구들이 몇 명 있는데, 그 원고와 일기장 등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
1973년 4월 29일 바트 퓌싱 요양지에서 필자가 에파를 만났을 때 그녀는 “일기장은 아마도 자일러 여사가 소각했을지도 몰라요. 일기에 실린 내용들이 가정의 내면적인 부분까지 너무 세세히 서술되어 있을 것을 우려했을지도 모르지 않아요”라고 하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에파의 막연한 추측일 뿐이다. 분명히 탈고되었다는 “압록강은 흐른다”의 속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이미륵의 동기 동창인 안젤름 샬러 박사는 필자와 대담할 때 “혹시 이미륵 자신이 소각했을지도 몰라요”라고 추측하였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속편 내용의 대부분이 그가 독일에 도착한 이후의 생활과 체험으로서, 그가 살았던 독일은 당시에 전 세계가 손가락질하고 욕하는 대상국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요”라고 개인적인 추측을 얘기해 주었다.
에파는 대학에서 수업을 마치거나 연구실에서 자료 협조를 받고 난 후에는 주로 슈바빙 근방에서 산책을 하며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녀가 학위논문을 쓸 당시 학문적으로 지도교수 이외에도 이미륵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일 것이다.
범우사발행 [책과인생] 2010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