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김재원 박사 (1909-1990)

김재원 박사에 대해서는 오토 자일러, 그의 여동생 베르타, 뮌스터(Münster)에
사는 대학동창 엔네 보르네만(Enne Bornemann) 여사, 고병익 교수 등 여러 사람
으로부터 얘기를 들은 바 있다. 1972년 여름 객원교수로 뮌헨에 온 고병익 교수를
만나 대화 중 김재원 박사의 서울 주소를 받게 되어 그해 9월 29일 서울에 거주하
는 김재원 박사에게 편지를 보냈더니 12월 4일 회신이 왔다. 김재원은 1929년 시
베리아행 기차를 타고 베를린을 거쳐 뮌헨으로 공부하러 오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당시(1929년) 뮌헨에 거주하는 한국 사람은 이미륵뿐이었다고 하였다.
“1929~1934년 간 내가 뮌헨에 있었는데, 그때는 한국 사람으로는 나와 이미륵뿐
이었습니다ꡓ(1972년 12월 4일자 필자에게 보낸 편지). 11월에 대학에서 입학허가
서를 받을 때까지 이미륵에게 독일어를 배웠다고 했다. “독일 말은 이의경에게서
열심히 배웠지만 혼이 났어요. (……) 공부는 본래 철학을 하다가 교육학을 했는데
죽을 고생을 했어요.” (신동아, 1970년 4월호, 191쪽). 김재원의 글에 의하면 1929
년 당시 이미륵은 “이자르강에서 멀지 않은 ‘베스터뮐슈트라쎄(Wetsermühl―
Strasse)’라는 곳에서 살고 있었으며, 방세는 월 20마르크 정도의 빈대가 많은 조그
만 방이었다”고 한다. 이 박사가 1928년에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당시에 그가
외국인(중국인) 신분에 동물학 전공으로는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 글을 써서
고료를 받아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유일한 수입이라고는 독일신문같은 데에
가끔 한국의 민담이나 이야기 같은 것을 써서 받는 고료였으나 그것은 생활비의 몇
분의도 되지 않았다.(김재원: 《여당수필집》, 1973년, 탐구당, 127쪽 참조).

그때 두 사람은 매일 열두 시에 만나서 대학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먹으면서 김재
원은 여러 가지 독일생활에서 주의할 점, 대학 분위기와 여러 가지 조언들을 들었
던 것 같다. “독일어에 불통한 나는 처음 적어도 2,3개월 동안은 이씨가 나의 유일
한 말동무였고 지도자였다. 그는 정확한 독일어에 대한 지식의 소유자로 그 덕택에
나 자신도 오늘까지 독일어에는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여당수필집》, 127쪽)
이미륵은 1928년에 박사학위를 마치고, 김재원은 1929년 대학공부를 시작하면서
두 사람은 뮌헨에서 한때는 잠시 자취도 함께 하였으며, 대학식당에서도 점심시간
에 거의 매일 만났다고 하였다. 필자가 이 추적 작업을 시작할 때 김재원은 뮌헨에
서 지냈던 이미륵의 생활과 형편을 가장 정확히 증언할 수 있는 유일한 한국인이었
다. 김재원의 기억으로는, 30년대를 전후하여 뮌헨에 잠시라도 체류했던 한국인은
음악가 안익태, 화가 배운성, 미국에서 작가 활동을 하던 강용흘, 의학도 김준엽 등
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뮌헨에 얼마동안 있었으며 또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였는지
는 알 길이 없으나, 이미륵을 만난 흔적들은 보인다.

1930년대 초 김재원에게 정규적으로 오던 학비가 잘 오지 않아 이미륵에게 얼마
씩 주던 돈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 기숙사에서 만난 일본 대학생
이 일본어로 된 의학 논문을 독일어로 번역할 사람을 구한다기에 이미륵에게 소개
하여 그가 번 번역료가 얼마 동안 생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김재
원은 회상하고 있다. (《여당수필집》,128쪽 참조). 얼마 후부터 이미륵은 베스터뮐
슈트라쎄에서 슈바빙의 ‘웅가러슈트라쎄(Ungarerstrasse)’의 어느 노부인의 아파트
로 이사하여 다른 독일 청년 몇 명과 같이 자취생활을 하였다. 의과대학생인 헬무
트 바하만, 영국인 유학생(미술) 해랄드 투비 등도 함께 생활하였고, 주인집 할머니
의 이름은 라우멘(Laumen)이라고 전해진다. 당시 그 청년들의 대부분은 아직 일정
한 직업도 없었고, 수입도 거의 없는 시인, 화가들이었다고 하니 이미륵의 생활도
어려웠으리라고 추측된다.

김재원은 1932년 말에 이미륵과 함께 무솔리니의 초청으로 이태리의 로마를 방
문하였다고 하였다. “1932년 12월에 무솔리니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유럽에서 공부
하고 있는 4000명 이상의 동양에서 온 대학생들을 로마로 초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미륵과 나는 로마 왕복 무료승차권을 받았습니다. 동봉하는 사진은 우리가 바티
칸 앞에서 찍은 것입니다.ꡓ(김재원이 1973년 1월 24일 필자에게 보낸 편지). 당시
뭇솔리니가 어떤 목적으로 동양 학생들을 로마로 초청하였고, 그곳에서 무슨 모임
이 얼마동안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언급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것을 상세히 물을
기회도 없었다.

1932년은 이미륵이 자일러 교수댁에 들어간 해였고, 김재원은 학위가 끝나기 2
년 전이다. 이미륵이 자일러 교수댁에 입주한 후 김재원도 뮌헨의 집은 물론, 그래
펠핑에 신축한 집, 그리고 슈타른베르크 호湖 근교의 베르크(Berg)라는 곳에 위치
한 별장으로도 몇 차례 놀러 가 자일러 교수 내외도 잘 알고 지냈다고 한다.

김재원은 1934년 뮌헨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끝내고 벨기에로 건너가 모 고고학
교수의 조교로 근무하면서 연구하다가 1940년에 귀국하여, 해방 후 초대 국립박물
관장으로 부임하여 무려 25년간이나 봉직하였다. 필자가 추적 작업을 하는 중
1972년 10월 4일 뮌스터에 살고 있던 김재원의 대학 동창 엔네 보르네만 박사
(Dr. Enne Bornemann)가 필자에게 흥미로운 편지를 보냈다. “이미륵과 김재원은
형제처럼 아주 가까운 사이였으며, 나는 김재원과 대학에서 사귄 친구”라고 소개하
였다. 김재원이 한국으로 귀국하여 곧 모 여의사와 결혼하고 나서, 지금 자신의 남
편이 된 에른스트 보르네만에게 편지를 하여 엔네를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였다
고 한다.

“우리는 결혼하기 전에 이미륵을 찾아가 에른스트와 결혼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
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마도 이미륵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기에 결혼을 하였
을 것으로 보인다. 보르네만 박사가 김재원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이미륵은 독
일에 사는 모든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이미 귀국한 한국인들의 독일 여자 친구, 다
시 말해 버림받은 독일 여성이 아기를 분만할 때 모든 경비를 부담해 가며 그들을
보살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미륵은 독일에 사는 모든 한국인들의 행동에 책임감
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김재원이 1948년 록펠로우재단 연구원으로 미국에 가 있을 때 독일에 있는 이미
륵과 몇 차례 서신왕래가 있었다고 한다. 이미륵은 김재원에게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희망을 말하여 왔으나, 나는 근 30년을 외국에서 생활하다가 갑자기 귀국한
다는 것은 여러 가지 그야말로 물심양면 준비가 없이는 어려운 일이라는 뜻을 전하
였고, 다행히 내가 살던 관사가 널찍하니 귀국하면 한 동안 내 집에 있으라는 말까
지 하였다. (……) 1949년 1월 미국에서 돌아온 후 얼마 안 되어 자일러 부인이 나
에게 서신을 보내 이의경 씨가 병중이라는 말을 하여 왔고, 될 수 있으면 나의 미
국친구들의 손을 거쳐서라도 어떻게 ‘쌀’을 보내줄 수 없는가라는 부탁이 있었다.
이것을 실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동안 이의경 씨의 부고를 받았다.” (《여당수필
집》, 134~135). 김재원 박사는 이미륵과 상당히 가깝게 지내던 사이로 이미륵을
소개하기 위해 조선일보에 <이미륵 씨의 생애> (1959년 6월 1,2,3,4일)라는 글을
발표하였으며, 1973년《여당수필집》(탐구당)을 발간할 때에도 같은 글을 보완하여
실린 바 있다.
사람으로는 나와 이미륵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