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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츠부르크대학생 시절의 이미륵(1922년)

연재를 시작하며 

  의학공부를 홀연히 중단하고 감성의 텃밭을 ‘글’이라는 쟁기로 가꾸면서 다듬어 낸 멋과 아름다움, 자아현실과 시공세계를 인식하여 가는 동안, 조국을 멀리 두고 기나긴 여정 속에서 향수에 파묻혀 번민하며 이국땅에서 30년을 살았던 한 한국작가 이미륵(1899~1950)의 모습이 눈앞에 훤히 떠오른다. 그의 작품들을 읽고 난 후, 이 작가를 보는 독일인들의 시각과 반응을 관찰하고, 그분과 가까이 지내던 벗들과 제자들을 찾고 만나기 시작한 지 어언 40년이 되었다. 
 

  친구 분들을 만나서 옛날 얘기를 나누고 “인간 이미륵은 잊을 수 없는 인격자”라고 회상하는 수많은 친구들과 제자들, 자료들과 편지, 기사들을 하나하나 섭렵하면서 필자는 무한한 감동에 직면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독일 땅에 남긴 ‘인간미’와 ‘따스함’이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구석구석에 변하지도 않은 채 절절히 배여 있어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작가를 압박했던 향수와 역사의 질곡을 절감했던 이야기들을 함축한 글들은 독자들을 더더욱 설레게 한다. 그런데 이 작가의 발자취를 뒤쫓으며 자료들을 찾아 하나하나 정리한다는 일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모험인가? 

  언젠가는 평전이라는 작업도 반드시 끝내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그분의 발자취를 더듬기로 결심하였다. 필자는 고인을 직접 만나본 적도 없고, 인척관계도 아니다. 그래서 자료를 찾는데 어려움이 많기도 하였다. 숨어있는 자료와 사람들을 찾는 일, 있는 그대로의 자료와 사실에 충실해야 하는 문제, 많은 친구들이 연로하여 이미 타계했다는 사실 등등 때문에 작업이 쉽지 않았다.  

  작가가 독일에서 살았던 기간이 30년, 실로 기나긴 세월이었다. 그의 옆을 지켜주던 친구들의 증언에 충실하면서 조금의 가감도 없이 진솔한 ‘평전’으로 성공시켜 보려는 의욕이 필자를 너무나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이 진실되어야 하겠고, 혹시라도 고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부분이라도 생기면 절대로 안 된다는 강박감 같은 것이 항상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 추적 작업을 시작한 지 어언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어딘가에 숨어있을 자료들과 유작들은 어떻게 하고 도대체 누가 찾아낼 것인가! 엄청 중요한 자료가 아직도 어딘가에 숨어있는 것이 아닐까?  

  옛날 신문들을 뒤적여야 했고, 가까이 계셨던 분들의 증언이 절대적이었다. 이 숨어있을 자료들을 생전에 가까이 지내던 독일친구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없이 도대체 어떻게 찾으며, 알고 지내던 동료들이나 친구들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실로 막막한 일이요, 무거운 과제였다. 

  그래도 유학시절 나는 잡초가 무성하고 초라했던 그의 무덤을 참배하면서 엄숙하게 머리를 숙이고 “나는 박사님을 오래도록 추모하며 그 엄청난 업적들을 다듬어 보고 싶다”고 고인 앞에 다짐하였다. 그러나 나의 본분은 빨리 대학에서의 공부를 끝내는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틈틈이 이미륵과 교분이 있었던 친구들이나 지인들을 찾아서 면담하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약 70여 명의 지인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듣고 또한 자료들도 받을 수 있었다. 

  필자가 이미륵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대학 3학년(1956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강의 시간에 정처묵 교수께서 흑판에 “Der Yalu fliesst”(압록강은 흐른다)라고 써놓고 독일말로 한국작가가 쓴 작품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도 겨우 알아듣는 형편이었던 필자는 “한국인이 독일말로 소설을 썼다?”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매우 신기하게 생각하며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작가 이름은 이미륵,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 며칠 후 우연히 서울대학교 《대학신문大學新聞(1956년 6월 13일자, 20일자)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어떤 이방인독일 사람들의 추억 속에 살아있는 한국인> 이라는 제목으로 고병익 교수가 기고한 글이었다. 고병익이 뮌헨에 공부하러 가서 며칠 후 슈바빙의 어느 맥주 집에서 이미륵의 친구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 이야기로서 매우 흥미로운 글이었다. 이번에는 고병익 교수가 《신태양新太洋(1958년 2월호)에 <독문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와 그 저자>라는 글도 발표하였다. 

  1958년부터는 필자가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복무하게 되어 진해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1959년 어느 서점에서 우연히 《여원(1959년 5월호)이라는 잡지에서 전혜린 씨가 쓴 <이미륵의 무덤을 찾아서>를 읽게 되었다. 묘소참배에 동행했던 사람은 T라는 사람과 S양이며, S양은 20대에 피서지에서 이미륵을 알게 되어 여러 해 동안 서로 친분이 있었던 엘리자베트 샬크가 거의 확실하다.  

  같은 해 이 잡지의 6월호도 접하게 되어 뒤적거리다가 이번에는 <이미륵 씨와 함께 보낸 가을>이라는 독일분이 쓴 추억담을 전혜린 씨가 번역한 글을 읽게 되었다. 독일분의 이름을 그 당시에는 유심히 기억하지 않았지만 훗날 엘리자베트 셸크(Elisabeth Schelk)로 잡지에 적혀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문제는 이 Schelk로 오기된 이름 때문에 필자는 얼마간 고생하다가 전혜린 씨의 부군이신 김철수 교수가 독일 어느 지인에게 쓴 편지에 Schalk라는 이름이 언급되어 다행히 그 여성을 찾게 되었다. 뮌헨에서 엘리자베트 샬크 여사와 필자와의 오랜 만남과 서신거래는 뒷부분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독일에서는 이름과 연대만 대략 알고 있으면 주소를 찾기가 별로 어렵지 않다. 

  같은 해 6월 1일부터는 초대국립박물관 관장이었던 김재원 박사가 조선일보(1959년 6월 1, 2, 3, 4일)에 <이미륵 씨의 생애>라는 글을 연재하였다는 말을 듣고 나중에 학교 도서관을 통해 그 글을 찾아 읽어보았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김재원 박사는 1929년부터 1934년까지 뮌헨에 유학, 이미륵에게서 독일어도 배웠고, 함께 생활하여 당시의 사정을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아는 산 증인이었다. 김재원 박사는 1909년생으로 해방 후 초대국립박물관장을 역임하시다가 1990년 91세로 별세하였다. 

  1959년 전혜린 씨는 여원사에서 《압록강은 흐른다》를 우리말로 처음 번역하여 출간하게 되며, 그 역서는 아직도 국내에서 많이 읽혀지고 있다.  

  이미륵이라는 이름이 한국의 지상에 처음 언급된 것은 그가 1950년 3월 20일 독일에서 별세하였고, 장례식은 3월 24일에 거행되었다는 사실이 국내의 모 신문 소식란에 간단하게 실렸다는 말만 누구에게서 들었을 뿐 아직 그 신문을 찾지 못하였다. 매우 아쉬운 일이지만 누구라도 그 정보를 찾게 되면 연락을 주리라고 기대해 본다.


범우사발행 [책과인생]  2009년 5월호